시부모님과 교회생활 (13)

몸은 고되었으나 마음은 생생했던 시절

by 김별

결혼 후 30대의 십 년은 시댁 동네에서 시부모님과 아이들, 교회 공동체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몸은 늘 바빴고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생동감으로 넘쳐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은 인생의 한복판에서 가장 치열하게 움직이며 또 가장 싱그럽게 살았던 때였다.


시어머니는 외손주만 열두 명을 보셨음에도 친손주 둘을 보시고는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딸을 낳으셨으니, 어머니는 인생의 20년을 뱃속에 아이를 품거나 아님 등에 업고 사신 셈이었다.

그 시간을 떠올릴 때면, 나는 며느리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로서 연민과 존경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를 섬기는 일은 ‘효’라기보다 인간으로서 마땅한 의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넷째 시누는 같은 해 작은 엄마, 큰 엄마께서 모두 아들을 낳았는데, 엄마만 또 딸인 자기를 낳으셨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겠느냐고 회고하셨다. 마음 따뜻하신 시아버지께서는 늘 미역국을 끓이며 어머니를 다독이셨지만, 어머니 마음에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몸의 고단함보다, 마음의 짐이 더 무거웠을 거라 짐작한다.


남편은 외아들이었다. 어릴 적에는 물그릇도 따로 쓸 만큼 귀하게 자랐다. 철이 든 뒤에는 그런 차별을 불편해했지만, 시어머니의 사랑은 여전히 각별했다. 입이 짧은 아들을 위해 참기름에 고기를 볶아 밥을 먹이고, 결혼 후에도 “그 애는 참기름을 좋아한다”며 참기름을 댓병으로 짜 주셔서 나를 놀라게 하셨다.


장날마다 생갈치를 구워주던 기억을 남편이 이야기해도, 나는 비싸고 비린 갈치 대신 고등어를 굽곤 했다. 그러면서 나도 내 아들이 고등어 아닌 갈치를 구워달라 했으면 그리했을 거라며 속으로 웃었다.


"어머니와 아내의 사랑은 그 크기가 다르고 방식도 다르다"


어머니는 아들 속옷을 늘 삶아 새하얗게 입히셨다. 내가 색깔 구분 없이 세탁기에 돌려 누렇게 변한 런닝을 입힌 걸 보신 어머니는 기가 막힌 지 그저 웃으셨다. 딸을 많이 키운 사람은 마음이 넓다더니, 얼굴엔 깊은 주름이 많으셨지만 외며느리인 나에게는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신 적이 없었다.

참을성이 부족한 나는, 어머니는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불평 없이 견디셨을까 싶었다.


허리가 좋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내가 퇴근할 즈음이면 “엄마, 엄마” 하며 찾는 큰아이를 업고 대문 앞에 나가 계시곤 했다. 다행히 막내 시누가 함께 살아 아이 돌봄이 조금은 수월했다.


둘째 아이도 수술로 태어났는데 남편이 전화를 걸어 “엄마, 또 아들이야”라고 하자 어머니는 “어디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하셨다 한다. 당신은 그리 어렵게 얻은 외아들이었기에, 두 번째 손주도 아들이라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머니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그러다 손주 재롱에 해맑게 웃으시던 어머니는 결국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7년의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내가 출근을 하니 가사 도우미를 두고 우리 집에서 모셨으나 어머니께서 남의 식구를 곁에 두는 걸 힘들어하셨다. 해서 시누가 모시다 방학이 되면 내가 어머니를 모셨다. 우리 집에 계실 때는 내가 직접 목욕을 시키고 기저귀도 갈았다. 힘들었지만, 어머니 인생의 무게를 생각하면 고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느 여름 , 그날도 나는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렸는데, 변 색갈이 유독 좀 검었다.

그런데 그날 남편은 나를 편하게 해 주려고 점심으로 중국집 배달을 시켰는데 나는 하필 짜장면을 골랐다.

음식이 와서 남편은 같이 먹자 했지만,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맛이 없어 못 먹겠다 했더니 영문을 모르는 남편이 화를 내며, 자기도 같이 안 먹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먹어야만 했다.

어릴 적 피를 보면 한동안 붉은 수박을 먹지 못했던 나의 예민함으로 그날의 짜장면은 좀 그랬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성격이 워낙 깔끔하셔서 발에 때도 벗기고 천천히 목욕을 오래하고 싶어 하셨는데, 나는 후다닥 머리 감기고 샤워하는 정도로만 목욕을 시켜드리니 아쉬워하셨다. 나도 그걸 알았지만 아이들도 어렸고, 먼 출퇴근길에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났었고. 결국 나도 일 년 병가를 내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나는 프랑스에서 다니던 교회와 닮은 한국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교회생활로 마음은 평안했지만 체력은 따라주질 않았다. 밤늦게 남편 와이셔츠를 손빨래하고 있으면 둘째가 동화책을 들고 와 읽어 달라 해도 할 수 없었고 나는 아이와 함께 그대로 잠들곤 했다. 출퇴근 길은 멀었고, 일요일에 교회를 편히 가려면 토요일을 시댁에서 보내야 했기에 쉴 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성격상 시작한 일은 몰입해서 끝장을 보는 편이라, 교회 생활도 열심이었다.


성경을 깊이 읽고, 주일 봉사를 하고, 수요모임을 우리 집에서 열었다. 수요일이면 퇴근 후 청소와 간식 준비를 하고, 모임이 끝난 뒤 아이들 방을 정리하고 나면 밤 11시가 훌쩍 넘었다.

남편은 힘들면 다른 집에서 모여도 되지 않겠냐 했지만, 나는 사람들이 우리 집을 편히 여기는 것이 좋았고 봉사는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때 시아버지께서 폐암 선고를 받으셨다. 나는 이제 아버님은 반드시 구원받고 가셔야 한다는 믿음의 부담을 가졌다. 나를 보면 늘 웃어 주시던 아버님께, 예수님 이름을 함께 부르자고 두 손을 잡았다. 며느리의 부탁에 아버님은 그렇게 해 주셨고, 돌아가실 때의 얼굴은 병으로 고통받던 시간과 달리 참으로 평안해 보였다.


지금도 나는 아버님이 좋은 곳으로 가셨다고 믿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평생 선하게 사신 분이 평안에 이르셨다는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시누 형님들은 모두 근처에 살아 자주 모였다. 무슨 일이든 “엄마 집으로 오라”며 모였고, 음식은 형님들이 하셔도 설거지는 늘 내 몫이었다. 십 년 동안 우리는 거의 매달 두 번씩 비디오카메라와 생일케이크를 들고 모였다. 조카와 시누 형부들 생일까지, 온 가족이 함께 챙겼다.



결혼 후 나의 30대는 그렇게 대가족과 교회 생활로 흘러갔다. 나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도 좋다고 여겼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바빴지만 헛되게 여겨지지 않았다.


몸은 힘들었으나 마음은 늘 파릇하게 빛났던 시간들이었고, 그 시간들이 내 인생의 오월처럼 싱그럽게 기억된다.



« Si un grain de blé ne tombe en terre et ne meurt, il reste seul ; mais s’il meurt, il porte beaucoup de fruit. »

Jean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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