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북토크가 있는 날

by 김별

부사는 문장에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배웠다. 영어에서도 문장의 중심은 명사와 동사다. 동사나 형용사를 수식하는 부사는 늘 에 온다. 그래서 글쓰기에서는 부사를 줄이고 간결체를 유지하라는 조언이 정석이다.


그런데 그 부사를 제목처럼 내걸고 책을 낸 작가가 있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소위 작가다.


나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필명 ‘소위’를 떠올리게 된다.


‘소소한 일상의 위대한 힘’을 뜻한다는 그 이름과, 문장의 에 놓이는 부사가 삶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이 책의 선언은 닮아 있다.

아직 오십에 이르기 전, 이미 ‘소위’를 필명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작가는 일찌감치 삶의 내공을 체득한 사람처럼 보인다.


소위 작가를 온라인 글벗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구월이었다. 책을 선물 받고 곧바로 한 달간 프랑스 여행을 떠났고, 돌아와서는 여행기를 쓰느라 책을 바로 읽지 못했다.

이미 브런치에서는 서평 릴레이가 활발히 이어지고 있었기에 마음의 부담도 덜했다.


책이 출간되었던 시점에도 나는 발리와 호주를 다녀오며 여행기를 쓰는 동안, 내 삶에서는 여전히 여행이 먼저였고 글쓰기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기보다, 여행을 했기에 글을 쓰는 사람이다.


전주에서 소위 작가를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나의 몽골 여행기 강의 요청이 들어오자마자, 전주에 있는 작가가 떠올랐다. 그리고 “언제 커피 한잔 하자”는 Cha향기 작가님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우리는 그렇게 셋이 가을 ‘전주에서’ 만났다.



그녀는 글에서 느낀 이미지보다 더 밝고 맑은 인상이었다. 큰 눈과 환한 웃음 속에 성실함과 단단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한때 수녀를 꿈꿨던 작가의 글쓰기는, 어쩌면 또 다른 수행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수많은 부사 속에서 울고 웃으며 제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부사라는 다리를 건너, 그녀는 자기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의 ‘참나’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사랑의 본질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시 삶의 수면 위로 올라와 그 사랑을 확장해 나간다. 그것이 수행이나 수행자의 삶이 아니면 무엇일까.


서른두 살의 어느 여름, 그녀는 삶을 다시 살기 위해 수녀원의 문을 ‘무턱대고’ 두드린다. 돌아갈 길을 스스로 끊는 결단, 백척간두의 선택이다.

나 역시 한때 종교와 영성의 길 앞에서 가족마저 내려놓으려 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 결기의 온도를 이해한다.


그때의 나는 '무턱대고' 폭주하는 굶주린 맹수였고, 뚜렷한 표적 없이 '무턱대고' 쏘아 올려진 화살이었다.-92


이후 작가는 다시 삶으로 돌아와 소설을 선택한다. 오랜 시간 멀리했던 소설을 다시 붙잡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에 썼다고 말한다. 참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멈추는 일이야말로 가장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쓴다. 방황처럼 보일지라도, 그 방향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기에.


참나가 되기 위한 여정은

도저히, 못 견디지 않을까? -123


마흔을 넘기는 긴 시간 동안 소설을 버렸다. 아니 소설을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내겐 직업이 있고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었다. 이렇게 뚜렷한 물성이 있는 삶 속에 소설이 감히 발을 들여놓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칫 무모한 내가 소설의 손을 잡고 쓸데없는 가출이나 위험한 도피를 감행하게 될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124


그 누구도 인생을 똑같이 반복하여 살지는 않는다. '또다시'라는 부사는 과거와 현재를 단단하게 묶어 버리는 불가항력의 덫 같지만,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롭게 혹은 다르게 시작해야만 한다. 지금의 내가 반걸음 정도 앞장서서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는 과거의 나에게 말해 주면 된다.


'괜찮아. 나를 믿고 따라와. 또다시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인생을 송두리째 내맡겨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126


그렇게 그녀는 이 십 대부터 끄적거리고 핥았던 소설을 다시 쓰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기에 그에 함몰되지도 매몰되지도 않을 자신감과 함께.


그러나 그녀는 글쓰기의 실과 득을 생각해 본다. 글쓰기의 이점이 아무리 많다 한들 현실적으로는 그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손해나 고통이 더 크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론은 계속 써야겠다는 마음뿐이니 결국 괴테나 박경리가 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써 보자고 마음먹게 된다.


'기어이' 해내는 사람보다는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렇게까지 비장해지고 싶지는 않다.-143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는 글쓰기의 명암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글쓰기는 환희와 고통을 오가지만, 이미 중독된 사람은 멈출 수 없다.

성과와 좌절이 교차하는 가운데에서도 작가는 묻는다. “나는 왜 쓰는가?” 그 질문 끝에서 그녀가 붙드는 답은 거창하지 않다. 희대의 작가도, 영웅의 어머니도 아니어도 좋다. 그저 사랑이 깃든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내가 본 소위 작가는 삶의 기둥을 무너뜨리며 예술에 올인할 사람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고, 우울증을 겪는 남편을 살피고, 아픈 어머니를 돌보며 ‘잠시’라는 시간을 쪼개 글을 쓴다. 그런 그녀의 꾸준함은 독자에게 지속적인 공감과 위로가 되어 가 닿을 것이다.

사실 이 서평은 건너뛰려던 글이었다. 그러나 오늘이 북토크가 있는 날이라, 어젯밤 기어이 책을 다 읽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그녀의 북토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밤늦게, 때로는 새벽까지도 ‘잠시’를 떼어 글을 쓰는 작가에게 바라는 건 단 하나다. 부디 건강을 해치지 않고, 삶의 균형 속에서 오래 쓰기를.


성실함과 꾸준함은 필요하다. 그러했기에 이 출간도 이뤄졌다 본다. 둘째 아이를 낳는 꿈을 꾸고 이 책 출간제의를 받았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말이다.


마침내, 내 글이 책이 된다.

그리고 내 운명이 될 것이다. -250



책의 마지막 문장을 덮으며 나는 확신하게 된다. 성실의 끝에서 이 책은 탄생했고, 이 출간을 기점으로 소위 작가는 운명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수행자의 자세로 글을 쓰되, 공감의 촉수를 잃지 않는 작가. 민들레 홀씨처럼, 혹은 아바타의 해파리 같은 생명체처럼, 그녀의 글은 독자에게로 조용히 흘러가 연결될 것이다.

새해에 본 아바타 3편에 나오는 해파리 모습으로 바람에 떠다니는 작은 생명체가 그녀에게서 느껴진다. 그 촉수는 '영혼의 나무' 씨앗으로 나비족이 믿는 에이와의 연결을 뜻한다.

내가 느끼는 김하진은 그러한 촉수 같은 섬세함으로 글을 쓰고 독자와 연결하는 작가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그 부사들로
충분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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