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무엇일까? (28)

피로 이어지고 인연과 선택으로 확장되는

by 김별


가족이란 무엇일까.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결혼은 선택에서 시작되지만, 살다 보면 그것 역시 운명처럼 주어진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서전 앞부분에서 부모님 이야기를 이미 했으니, 여기서는 친정 삼 남매 이야기부터 잠시 꺼내보려 한다.


달 수로는 열다섯 달 차이인 오빠와 나는 거의 연년생이었고, 내가 일곱 살에 입학하면서 학년으로는 한 학년 차이가 났다. 오빠는 어렸을 적엔 성격이 깔끔하면서도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오빠가 녹음해 두었던 노래 테이프와 대학 시절 사 두었던 LP판으로 함께 음악을 듣던 기억이 남아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예반이었던 오빠는 자연스럽게 국문과에 진학했고, 다녔던 모교에서 국어교사로 퇴직했다. 전형적인 문과형 사람이면서 나이 들수록 정도 많고 소탈하다.


남동생은 또 다른 결이었다. 어렸을 적 동생이 칼에 손을 베었는데 부모님이 걱정하실 까 손을 쥐고 피를 멎게 하면서 울지도 않고 버텼던 기억이 있다. 삼남매중에서도 내내 효심이 유난했고 지금도 착한 동생이다.


동생은 지방 국립대 3학년 때 기술고시에 합격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군 면제를 받아 당시 23세 최연소로 5급 공무원이 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다 몇 해전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 국립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공무원 시절 동생의 청렴 성실함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지만 주변 일화로 남아 있을 만큼 유명했다.

나는 종종 “우리나라 공무원이 다 너 같으면 세상 걱정할 일이 없겠다”라고 하곤 했다.


동생은 자신에게는 아버지의 근검절약을 엄격히 적용하면서도, 남을 대할 때는 언제나 어머니의 넉넉한 품을 닮아 두루 베풀기를 잘 했다. 그래서 때로는 동생 앞에서 오히려 부족한 누나가 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이십 년 후 어머니 떠나시기 전까지 우리 삼 남매는 남은 효도를 다하고자 서로를 더 살피며 살아왔다.


어머니 장례 날, 군위 성모묘지에서 영정사진을 들고 빗속에 서서 하염없이 울던 동생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돌봐주어야겠구나.

그러던 동생도 어느덧 올해 환갑을 맞았다. 세월이란 정말 무상하고, 물처럼 흘러간다.

우리 삼 남매는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필요할 때는 자연스럽게 연락하고, 지낸다.

여형제가 없다 보니 내가 오빠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동생이 내게 자주 전화를 해 주는 편이다.

형제라도 서로 존중으로 적절한 거리는 유지하되 필요시는 언제든 달려갈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는 게 가족이란 생각을 한다.




친정에는 조금 특별한 전통이 하나 있다. 무려 40년 넘게 이어져 온 사촌계 모임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 큰집 사촌언니와 오빠들, 고종사촌 언니가 시작한 모임인데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지금도 봄·가을로 정기 모임을 갖고, 번개 모임도 있으며, 자녀들 혼사를 포함한 장모 시모등 각종 경조사까지 더하면 비교적 자주 얼굴을 보는 편이다.


친할머니의 호를 따라 이름 붙인 이 모임이 이렇게 오래 유지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우리 부모님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었지만, 서른여덟에 청상과부가 되어 다섯 남매를 키운 할머니께 효심이 지극하셨다.

어머니 또한 며느리로서 큰집과 시누들인 고모들에게 정을 표현하는 데 아낌이 없으셨다.

그 덕분에 형제간 우애가 자연스레 이어졌고, 그 아래 세대인 우리 역시 그 본을 따라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외동딸이었지만, 사촌 언니나 동생이 대구의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며 한 방을 쓰거나 한집에 지낸 적이 많았다. 그 시절엔 그런 일이 흔했고, 모두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그 일을 힘들어하거나 불평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막내 고모가 삶이 힘들 때 친정인 우리 집에 와 하소연하면, 부모님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우리 모임을 이어가게 하는 거 같다.





이제 혈연이 아닌, 결혼을 통해 또 다른 가족 속으로 들어간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남편은 일남 팔 녀 중 외동아들이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외동며느리가 되었다.

결혼 당시 시누 형님들은 외동딸인 내가 과연 이 집안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임했던 것 같다.


친정아버지의 말씀이자 가훈은 늘 먼저 “양보하는 사람이 돼라”였다.

게다가 당시는 교회 생활도 하고 있었기에, 내가 먼저 양보하고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래서였는지 명절에 모이면 서른 명이 훌쩍 넘는 북적거림도, 힘든 밥상 차림도 큰 무게와 부담으로 느끼지 않으려 했다. 시누 형님들이 우리 집에 묶고 가실 때도 나는 오직 표정 관리와 립 서비스로 분위기를 다운시키지 않겠다 마음 먹었고 덕분에 명절모임을 화기애애하게 보냈던 것 같다.


친정어머니마저 “너 하나 양보하면 그 집안이 다 편하다”며, 외동딸인 내게 굳이 명절에 친정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니 마음 가볍게 그리 했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힘들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마음먹고 하니, 크게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두 아들, 그리고 각자의 선택


이제 두 아들은 모두 서른을 훌쩍 넘긴 성인이 되었다.

둘째는 비교적 일찍 결혼했고, 며느리가 생겼다. 며느리는 나이에 비해 속이 깊고 착하다.


예전에 친정어머니가 “집안이 되려면 들어오는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이제 나도 실감한다. 둘이 알콩달콩 지내는 모습도 보기 좋고, 며느리가 우리 부부와 큰아이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새 가족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큰아이는 현실적인 여건도 있지만, 일찌감치 비혼을 선택한 자유로운 영혼이다.

언젠가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나 또한 본래 자유를 갈망하던 사람이었기에 아이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결혼하지 않은 아들이 내 아들이어서 좋은 점도 많다.

더러 우리 부부가 큰아이 집에 오가며 일주일씩 머물다 오기도 하는데, 그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것도 그 중 하나다.


이런 편안함이야말로 가족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다시 한번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 땅을 걸어가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인연인 가족, 며칠 전에도 막내 시누남편의 힘든 수술에 두 아들이 고모, 고모부 병문안을 다녀왔다. 우리도 넷째 시누 다리수술에 다녀왔고 이렇게 서로 필요할 때 따뜻한 손 잡아주며 함께 가는 길, 그것이 가족이란 인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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