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는 유럽에 비해 지리적유전적으로는 우리와 더 가깝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들에 대해 많이 알려진 것도, 우리가 아는 것도 별로 없는 편인데 앞으로는 동남아, 유럽, 북미는 기본적으로 패스 한 여행객들에게 이곳이 또 다른 여행의 욕구나 니즈가 불붙는 곳이 될 수도 있다 본다.
출국날, 인천에서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기내방송으로 항법 관련 문제가 생겼으니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라 한다. 지금껏 비행기 연착은 겪어봤어도 다시 갈아타란 건 또 처음이다. 허 참 인생도 여행도 새롭게 체험하러 온 것이니 하며 웃고 말았다.
덕분에 몇 시간 늦게 출발해서 타슈켄트 호텔에는자정 무렵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곧장 쓰러졌다.
사실 타슈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긴 하나 우리는 건너뛴 셈이다. 소련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져서 1930년에 수도가 된 타슈켄트는 거의 4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사마르칸트나 다른 도시에 비하면 여행자들에게는 큰 매력이 아닌 셈이다.
자고 이튿날 아침에 잠시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그래도 중앙아시아와의 첫 대면식을 치렀다 여기고 바로 사마르칸트로 이동했다.
가도 가도 초원인 평원을 4시간 달려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사실 더 빠르고 편한 고속철도가 있음에도 이미 일행들을 위해 버스가 예약되어있었다.
앞으로 보름동안 함께 할 일행들은 말레이시아 여행친구 4명과 한국인들 10명으로 구성된 다국적 자유여행팀이다.
그러나 말이 자유여행이지 내가 혼자 여행하던 지난해 5개월과는 사뭇 다른 일정이 되리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보름동안 탄탄탄국 3 나라를 돌아본다는 것만도 엄청난 거리기에 일체 개인일정의 자유 없이 단체로서 같은 일정을 공유하게 된다. 단독이든 단체든 여행마다 장. 단점이 다르다. 해서 모든 걸 내가 책임지고 하는 혼여가 아닌 이번 일행과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나로선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 약간의 긴장은 있었다.
하지만 함께 서로 조화롭게 협력해서 얻는 윈윈을 기대하니 긴장보다는 마음의 푸근함이 더 컸다.
이번엔 자유 대신 편함과 편리함으로~! 여행할 거니까
4시간 사마르칸트로 가면서 드는 생각이 고속철도로 편안히 갈 수도 있는 길이었지만 이렇게 일행들과 작은 차로 함께 덜컹거리면서 그 옛날 실크로드를 더듬고 느껴보며 가는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 아니 어쩌면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가게 된다.
실크로드 일명 비단길은 중국과 지중해 지역을 연결하는 대규모 무역 네트워크였다.
서 쪽으로는 바그다드를 거쳐 로마에까지 이르렀으며 사마르칸트는 그 실크로드의 거점도시 중에서도 장안, 콘스탄티노플과 함께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 가슴이 뛰고 '모래의 도시'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오래 전의 대상들의 낙타행렬과 오아시스풍경, 그리고 그들의 조상 소그드인들의 상업인 유전자를 떠올리며 두루 상상하며 가게 된다.
재밌는 것은 차를 타고 가면서 어쩌다 지나가는 옆차의 사람이 손을 흔들길래 나도 따라 해 보니 그다음 차도 계속 운전수들까지 손을 흔들며 마치 나를 환영해 주는 듯 우호적이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노랑머리 파란 눈의 서양인들에서 볼 수 없는 동양적인 느낌에다 동양인 치고는 키가 크고 여자들은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남자들은 건장한 외모다. 그런 그들이 묘한 친근감이 주는 신뢰감으로 깊이 있게다가온다.
늦은 공항도착으로 하지 못한 환전을 해야 하는데 가까이 환전소가 없다. 나는 보통 수수료가 있건 말건 ATM에서 필요한 만큼 현지돈으로 뽑아 쓰며 여행하는 스탈인데 사마르칸트에 도착해서도 여기 돈 숨으로 못 바꾸고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일행 중 몇 분이 현금인출기에서 100달러를 뽑고 나니 더 이상 기기에 돈이 없단다 ㅠㅜ
아~! 여기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전에는 사회주의 국가였지하며 하며 나름 이 상황을 이해하려 해 본다.
점심시간 가이드 카릴다에게 물어봤다. 그녀는 사춘기 딸을 포함해서 자녀 셋을 둔 사십 대 아줌마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 않았냐? 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주로 독일 이태리 러시아 여행객이 많았단다.
아마도 한국 배낭 여행자들은 있어도 전체적으로 가이드랑 움직이는 여행자들은 아직 중앙아시아를 덜 오나 보다 싶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한국여행객들은 주로 한국어가 되는 현지가이드를 채용하기 때문에 가이드 카릴다는 잘 모르고 있었다)
우리에게 해외여행하면 첫 번째가 가깝고 만만한 동남아고 두 번째가 아마도 서유럽정도, 그 후 동유럽일 거다. 그러니 아직 중앙아시아는 미지인 것인가? 생각하니 한 면 웃음이 났다. 사실 유라시아 대륙의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이 대륙의 중앙에 먼저 호기심을 가지게 되어 먼저 보려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웃을 수도 없는 것이 여행을 꽤나 좋아하는 나도 미루다 미루다 이제야 이곳에 왔다는 사실!
이번에 내가 방문할 스탄국 세 나라를 합치면 남북한 총합의 30배가 된다. 그런 세 나라가 지리, 역사, 인종적으로 가까운 나라이기도하지만,그동안 근 백 년 동안 1991년 소련연방이 무너질 때까지는 우리와 물적, 인적, 문화적 교류가 없었던 탓에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가 되어서 우리랑 소원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앞으로는 한국여행객들에게 더 각광받을 것이라고 예측해 보는데 아래와 같은 이유로 그러할 것 같다.
첫째는 이곳의 뛰어난 자연환경이다.
둘째는 저렴한 물가다.
세 번째는 현지의 '한국인 선호도' 바람이다.
이곳도 꽤 많은 자유여행자들이 오고 있고 사실 나도 와서 보니 우즈베키스탄도 혼자 자유여행이 가능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이곳 사람들은 아주 친절하고 자유여행을 와도 한국에서 일하다 온 외노자 출신이나 한국어를 배우는 현지인을 만나서 가이드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주요 관광명소가 중심부에 몰려 있기 때문에 도보로 둘러보기도 가능하다.
흔히 레기스탄으로 시작해서 레기스탄으로 끝나는 도시라 하듯이 레기스탄에서 이슬롬 카리모프의 동상 쪽으로 올라가 북동쪽으로 가면 비비하눔 모스크와 재래시장인 시압 바자르로 갈 수 있고, 같은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면 전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의 묘를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샤히진다 네크로폴리스가 나온다. 사마르칸트는 관광객들이 많은 도시라 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표지판들이 잘 되어 있어 큰 길만 따라가도 관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택시비가 우리 돈 1000원 안팎으로 아주 저렴하다. 어플 택시 이용도 가능하니 바가지요금 걱정 안 해도 되고 근거리 도시 이동시는 거의가 확정된 요금으로 택시합승으로 갈 수 있다.
도시 간 큰 이동도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고속철도나 버스가 편하게 연결되어 있어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여행이 쉽다고 본다.
첫날 이동 후 사마르칸트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으로 먹은 비프샤슬릭, 그리고 고기가 느끼하지 않도록 토마토, 오이, 양파가 기본으로 들어가는 샐러드가 맛있었다. 샤슬릭은 중국식 양꼬치에 비해 고기를 뭉덩뭉덩 크게 썰어 쇠꼬챙이에 구워 낸 요리인데 이곳에 와서 이걸 먹는 거 만으로도 반은 유목민이 되어보는 느낌이었다. 미리 고기에 간이 배어 있어 그런지 담백하면서도 맛있었다.
양이나 쇠고기를 얇게 둘둘 말아 부드럽고 기름기 있는 부분이랑 섞어 구워주기도 해서 고기의 살만 먹는 팍팍함도 없고 고소했다. 여행지 어느 곳이든 그 지역 음식문화도 주요한 부분인데 여기 와서 불맛 배인 고기를 먹는 미각의 즐거움을 한껏 누려본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인 레기스탄 광장으로 갔다. 지금껏 터키나 이집트, 모로코등 다른 이슬람국에서는 모스크가 중심인 사원만 주로 보았는데 여기 광장에서 독보적인 세 마드라사를 한꺼번에 한 장소에서 보니 놀라웠다. 원래 마드라사는 신학교 건물로서 모스크 주변에 콤플렉스로 같이 짓는데 이곳 에는 넓은 광장 주위로 세 마드라사가 ㄷ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마드라사 안에는 일반적으로 나무가 심겨 있는 넓은 공간이 있는데 지금 그 넓은 마당 주변은 온통 다 아라비안나이트를 방불케 하는 상점들이 있었다. 레기스탄의 두 마드라사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다른 도시의 대부분 마드라사도 마찬가지였다.
14세기 칭기즈칸의 손자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제국의 수도로 삼았으니 이렇게 광장에다 화려하게 지었지 않나 싶었다. 현재 도시에 남은 수많은 역사적 관광지가 거의 다 당시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니사마르칸트는 티무르와 함께 중앙아시아의 문화, 예술, 무역의 중심지로서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보냈다고 본다.
세 마드라사 중에서도 나는 15세기에 지어진 울르그 벡 마드라사가 그 안에 박물관처럼 꾸며져 있어 더 흥미로웠다. 마드라사 이층에는 당시 학생들이 사용하던 50개의 공부방이 있었고 양옆으로 33미터 높이의 아름다운 미나렛이 서 있었다.
울르그 벡은 (1409-1449) 티무르 칭기즈칸의 증손자로서 그 자신이 대학자였기에 종교뿐 아니라 수학, 역사, 천문학 등 학문의 발전을 장려하였으며 그는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무슬림의 의무이다’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그는 이곳뿐 아니라 부하라에도 마드라사를 세웠다. 울르그 벡 마드라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오늘날 이슬람의 수학과 기하학의 발전, 그리고 십자군전쟁으로 인한 문명의 교류가 없었다면 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도 없었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 보았다.
사마르칸트는 기원전 8세기부터 번성했던 도시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도 와서 보고 감탄했던 곳이고 14세기 모로코의 대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사마르칸트를 보고 '가장 크고 완벽한 도시'라고 칭찬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시의 주인은 원래 페르시아계 민족이었으나 그 후 8세기 경에는 잠시 투르크계가 되었고 13세기에는 몽골제국이 이 도시를 지배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이슬람 세계의 문화와 학문의 최전방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마르칸트 첫날은 일단 레기스탄 광장을 둘러보고 저녁에는 호텔 근처에 그 이름도 '사마르칸트'인 좀 큰 레스토랑에 갔다. 가족이나 지인들 모임으로 대거 예약해서 오는 곳인데 좀 화려한 이층 건물에 음악도 있고 춤을 출수도 있는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밥을 먹고 나서 흥겹게 춤을 추었는데 원래 흥이 많은 가 싶기도 하고어른 아이들이 다 함께 그렇게 춤추는 모습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들의 흥겨운 분위기를 보며 같이 간 일행들과 나도 사마르칸트의 음식과 사람들에 푹 빠져 같이 춤도 춰 본다.
나중에 아들에게 우즈베크 음식을 추천해 주려 한국의 식당을 검색하니 '사마르칸트'란 이름으로 여러 개 나온다. 서울뿐 아니라 안산, 광주, 부산등 우리나라 전국에 '사마르칸트' 식당이 있었다 ㅎㅎ
금방 화덕에서 구워내어 맛있는 큼직한 이곳 빵
쇠꽂이에 구운 샤슬릭을 처음 먹어본다
레기스탄 광장
중앙아시아 사람들 풍습이 원래 결혼하면 유명한 건물 앞이나 동상에서 기념촬영을 한다는데 아마도 행복한 결혼이 오래 가게 해달라는 염원을 조상들께 비는 마음일 거라 여겨졌다.
세 개의 마드라사가 함께 보이는 레기스탄 광장 - 왼쪽이 맨 먼저 지어진 울르그 벡, 중앙이 틸라고리 그리고 오른쪽이 사자가 있는 세르도르 마드라사다.
잎이 넓적한 플라타너스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습도가 없어 상쾌한 6월의 날씨다. 오른쪽 검은 가방을 메고 가는 사람이 가이드 카릴다다.
17세기에 지어진 세르도르 마드라사는 세르도르가 '사자'라는 뜻으로 왕은 동물등 우상을 금지시키는 이슬람법을 어기면서도 자신의 왕권과시를 위해서 입구문양에 사자를 넣었다는 설도 있고, 빛과 함께 사자를 그려 넣어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파란색 지붕 돔은 하늘이 맑다, 전쟁이 없어 평화롭다를 상징하는데 정말 매끄럽게 느껴졌다. 티무르는 이 파란 하늘색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문양이 화려한 울르그 벡 마드라사 정문
천문학의 대가였던 왕과 학자들이 존경스럽다
마드라사 천정의 천문학도
틸라코리 마드라사의 황금방은 실제 노란색 부분이 다 황금이었는데 누군가(러시아인?) 다 훔쳐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