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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Jul 27. 2023

중앙아시아 3~'지붕 없는 박물관' 부하라로

 중세로의 시간여행 오아시스도시 부하라

지붕 없는 박물관

2023년 5월 30일~31일


사마르칸트에서 비비하눔 모스크 옆 시압 재래시장을 들러서 체리를 한 보따리 샀다. 우리 돈 3천 원에 열 사람이 나눠 먹을 양이다.  나는 과일 중 먹기 편하고 맛있는 체리를 제일 좋아하는데 행복하다. 우리 어렸을 적엔 비싸서 케이크 위 장식으로만 보던 체리를 김태희가 콩밭 멘다는 이 나라에 와서 실컷 먹어본다.


저녁엔 다시 레기스탄 광장으로 가서 야경을 감상했다. 이곳 주민들도 다 나와서 바람을 쐬는 듯 광장의 라이트 쇼가 사람들의 삶에 여유와 활력을 불어주는 듯하다. 앉아서 망연자실 멍 때리며 어쩌다 실크로드 여행의 첫 방문지가 된 이 도시 사마르칸트가 내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때 사마르칸트 비비하눔 모스크 옆 식당엘 갔는데 그곳에서 성호라는 학생을 만났다. 그는 우즈벡인이지만 한국이름을 쓰고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내 아들보다 어린 그가 고등학교 졸업 후 러시아로 일하러 갔다가 프레스에 팔을 찍혀서 왼팔, 왼손을 의수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으로 가서 대학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일을 하고 있었다. 

성호의 맑은 얼굴과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고 기특했다. 마음이 짠해서 한국 오면 꼭 이모, 삼촌한테 연락하라며 같이 점심 먹은 일행들과 함께 연락처를 주었다. 여행지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곳에 대한 인상도 영향을 받는데 사마르칸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인상이 좋았다. 특별히 나에게는 맑은 얼굴의 성호가 며칠 동안 마음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사마르칸트에서 이틀을 보내고 다시 차로 4시간 걸려 부하라로 떠난다. 시가지를 벗어나 작은 동네를 지나가는데 마을 앞 길가에 엄청 큰 체리나무들이 많다. 어린 시절 과일이 귀했을 때를 떠올리며 아니 이렇게 귀한 체리가 도로 가에 그냥 저렇게 흔하게 있다니~! 하면서 안타까워한다. 나무가 커서 윗부분은 다 따 먹지도 못할 거 같은데 그냥 버려진다면 참 아깝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곳 사람들은 그냥 어차피 시장에서 사 먹어도 싸니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지나칠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나중에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가서 또 체리를 사 먹었는데 사마르칸트 시압시장 체리가 가장 달고 맛있었다. 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일행들이 다 한 보따리식 사서 차 안에서 돌아가며 꺼내놓고 먹었다.







부하라는 1만㎞에 달했던 비단길 위의 오아시스 도시요, 별명이 아예 ‘지붕 없는 박물관'이니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인구는 대략 50만 명이다.     


도시의 역사는 2,500년으로 추정되는 부하라, ‘부하라(Bukhara)’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사원’이라는 뜻이다.  8세기 이후 이슬람화되어 도시이름에 걸맞게 중앙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성지가 되었고 사마르칸트에 이어서 부하라칸국의 수도가 되었다.  

타지크어로 우물을 뜻한다는 하우스, 부하라 칸국 시절에는 그 하우스가 무려 50 여개나 있었다니 당시 오아시스도시로서의 번성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도시 안의 마드라사 건물은 거의  다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세계문화유산 유적지라고 썰렁하게 비워 두기 보다 상점으로 오히려 생동감 있게 활용함으로써 사람들로 북적대고 그곳을 방문하는 여행객들도 활기차 보여 좋았다.    


과거 부하라가 이슬람 최고의 성지도시라고는 하나 지금은 무척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실제 이란이나 중동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하면 여자들도 훨씬 자유롭게 활동하며 일하고 가이드말로는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는 점만 이슬람이지 다른 이들과 별 큰 차이가 없다 한다.  


서역과 중국을 잇는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으로서 인도의 모직과 중국 비단이 이곳을 통해 오갔고  지금도 지붕이 둥근 옛 건물들 안에 카펫과 의류, 방석, 가위등 잡화를 파는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타키’로 불리는 이곳 시장의 입구는 물건을 잔뜩 실은 낙타가 드나들 수 있도록 특별히 사람 키 두 배 보다 높은 아치형 문으로 되어있다. 우리 일행들도 다들 이곳의 명물이라며 가위를 하나씩 샀고 나는 세밀화 그림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가위는 카펫 제작과 관련 더 발달하지 않았으려나 짐작해 보았다.


부하라의 주요 유적지는 중세의 모습이 담긴 10세기 건축 이스마일 사마니 묘와 12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47m에 이르는 칼란 미나레트와 모스크, 부하라 칸국 왕이 거주하던 궁전과 아르크 성 등이 있다.


이스마일 샤마니 묘는 그가 선친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었는데 후일 그와 그의 아들까지 묻힌 가족 묘가 되었다. 그는 9∼10세기 부하라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던 인물로서 그와 동시대에 이슬람 최고의 종교학자와 유럽의학의 기초가 된 의학자 그리고 대수학의 아버지라 할 학자들이 당시 함께 이 부하라에서 활동했다 한다. 무덤은 색벽돌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18종류의 잿빛 구운 벽돌로만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이 묘는 이슬람뿐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나 불교적 색채도 가미된 종합예술작품 같은 문화적 복합물이라는 거다. 묘에 사용된 벽돌은 수천 년을 견딜 수 있도록 낙타 젖을 섞어 반죽했다. 실제 길에서 만난 부하라의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그런 질감을 지니고 있었다.


휴게소도 없이 4시간을 달려와 드디어 부하라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이전 상인들의 중심지였던 '라비 하우스(Lyabi Khauz)' 앞의 올드타운 호텔이었다. 사막과 초지를 건너온 대상들의 느낌이 아마도 우리와 같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들은 말과 낙타를 타고 왔고 우리는 차를 탄 것만 다를 뿐이지 지친 나그네의 심신이 드뎌 우물과 쉴 곳을 보고 느끼는 감흥은 같지 않았겠는가! 

라비하우스는 하우스가 우물이란 뜻이니 커다란 인공연못이다. 그곳에  500년 된 뽕나무는 죽었어도 나무 둥치는 그대로 남아있고, 대상들의 피로를 달래준 음악과 음식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침내 오아시스에 다다른 대상들처럼 여유롭게 고기와 야채 샤슬릭을 먹고 음악과 춤도 즐기고 나서 하만-아랍식 목욕을 체험하러 갔다.      

반지하식 목욕탕이었는데 도시에 유물로 남아있는 2개 중 하나였다. 내가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받았던 하만에 비해서 서비스는 세련되지도 섬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700년 된 유적지에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목욕을 하는 체험은 시간을 뛰어넘은 영광으로 여겨져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사마르칸트가 화려한 채색의 건물로 기억된다면 부하라는 그냥 13세기 모노톤의 중세 모습이다.  

오래된 단색의 벽돌건물로 소박한 모습이 부하라의 첫인상이다. 이러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과 상점을 운영하며 그들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으니 나는 마치 중세시대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가 된 듯했다.


부하라의 전설이자 상징인 칼란 Kalan 모스크와 미나레트는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라비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하만을 하러 가면서 모스크 광장을 지나가는데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보다는 더 도톰한 달이 떠 있고 붉은색, 파란색 색깔조명을 받는 광장을 보니 정말 신비하고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가이드는 내일도 올 거니 빨리 따라오라는데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은 그 모습에 심쿵해서 사진을 찍으며 쫓아가느라 발걸음을 허둥댔다.


몽골 칭기즈칸이 부하라를 침공해 수많은 이슬람 유적을 무너뜨렸을 때도 이 미나레트 탑만은 파괴하지 않았다 한다. 

이튿날 낮에 다시 칼란 모스크를 들렀을 때 그와 관련된 일화가 있어서 가이드가 길고 재밌게 설명해 주었다.


칭기즈칸이 한반도보다 넓은 키질쿰사막을 건너와서 부하라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도 피를 부르는 정복자의 잔인한 살생이 이어졌다. 항복하지 않고 무릎을 꿇지 않는 이에게는 무차별 무자비했던 그가 이슬람 사원을 보았을 때  "전체 우주가 신의 집이다. 특별히 그중 한 곳을 지정해서 거기에 참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며 다 파괴했다 한다.  


어쩌면 땅에 뿌리를 두고 신전을 짓던 이들에 비하면  형상화된 신의 모습도 신전도 없이 바람 따라 바람처럼 떠돌던 초원의 유목민인 그들의 신 '탱그리'는 따로 신전이 필요 없는 공기 같고 바람 같은 신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그가 부하라를 점령하고  승리의 축배를 들었을 때 술기운이 오른 칭기즈칸은 말에 올라 높은 칼란 미나렛 꼭대기를 보려고 고개를 젖혔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고개를 젖힌 그에게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서 쓰고 있던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 투구는 전쟁에 임하는 장수에게 목숨 같은 상징이었는데 그 투구가 떨어지다니 그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투구를 집기 위해 허리를 숙였고 그 순간 칭기즈칸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내가 칭기즈칸이다.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아직 누구 앞에서도 투구를 벗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여기 이 미나렛은 신령한 것이다. 그러니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둬라."  


결국 탑의 높이와 바람이 이 미나렛을 보존하게 해 주었다는 말이다.  탑은  땅속 10m 깊이에 뿌리를 박은채 지름 9m, 높이는 47m에 이른다. 원통형의 탑신은 흙벽돌로 띠를 둘러 치장했고 꼭대기에는 빙 둘러 16개의 등화창이 나 있다. 혹자는 칼란 미나렛은 그 당당한 모습에도 여성스러움이 녹아 있다며 그 모습이 마치 체스판의 몸매 좋은 퀸을 빼닮았다고도 하기도 한다.


원래 미나렛의 주기능은 원래 하루 5번 기도시간인 아잔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47미터의 이 높은 탑은 적들을 살피는 망루역할도 했을 것이다. 아울러 꼭대기에 불을 지피면 실크로드의 행상들은 불빛만을 보고도 오아시스인 부하라를 찾을 수 있었기에 탑은 사막의 등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비단길은 기원전 2세기 한 무제 때 장건의 13년에 걸친 서역여행으로 열리고 뚫린 동서양의 교역로였다.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이곳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서 만나 로마로 향했으니 부하라 일대가 오아시스 비단길의 딱 중간인 셈이었다. 
낙타 200∼300마리를 끌고 하루 6시간씩 30∼40킬로를  수개월을 걸어온 대상이 그 고단한 여정의 한밤중에 부하라의 랜드마크인 칼란 미나렛 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등댓불을 본 순간의 그 기분과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며 올려다보니 나도 좀 뭉클해졌다.


미나렛 옆의 칼란 모스크는 이슬람 성지도시 이름에 걸맞게 한꺼번에 1만 명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큰 규모를 자랑한다.

레기스탄 광장 야경감상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가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위성도시 같다면 , 사마르칸트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로서 화려하게 큰 도시요, 부하라는 소박하나 그윽한 숨겨진 보물 같은 도시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을 더 깊이 보고 느끼려면 부하라로 가라는 말도 있다.


리바 하우스옆 작은 공원에서 재밌는 동상 하나를 만난다. 나귀를 타고 웃고 있는 신발이 반쯤 벗겨진 시인의 동상이다. 그는 이슬람 수피교 지도자이자 시인인 호자 나스레딘이다. 그는 성직자의 위선을 꼬집으며 서민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노래하였고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술을 대주가로 마시며 즐겼다 한다.

자유분방했던 시인 호자는 


 "장미는 내 가슴에, 술은 내 손에,
연인이 내 곁에 있다면.. 군주도 노예일 뿐!"


이라 꼬집으면서 말하고도 그의 지혜로운 유머로 티무르왕을 사로잡았다는 일화가 있다.



호자 : 만약 튀르크 여인이 나의 마음을 훔친다면, 나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그녀 얼굴의 점과 바꾸겠소
티무르 : 나의 빛나는 검으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정복하고 꾸몄는데, 그대는 일개 여인의 얼굴에 난 점과 바꾸려 하는군!
호자 : 아아 세계의 지배자시여, 이러한 방탕함으로 말미암아 제가 이러한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하의 티무르를 대하면서도 거침없이 풍자하였지만 그의 재치 있는 대답에 감탄한 티무르는 그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하여 그의 빈곤을 해소해주었다 한다.


우즈베크 둥근 빵

사마르칸트의 시압 재래시장은 비비하눔 모스크 바로 옆이다. 사원 주위로 600년 전부터 상인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가장 눈에 띄고 많은 것은 역시 건과류와 견과류들인데 견과류를 종합선물세트처럼 포장한 것이 재미있다.

빵도 큼직하니 먹음직스럽다

비비하눔 모스크, 티무르의 여인중 한 명이었던 비비하눔은 칭기즈칸의 후손이었기에 그는 '칭기즈칸의 사위'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를 너무 사랑한 그는 인도원정에서 가져온 화려한 원석으로 90마리의 코끼리를 데려다 사역을 하며 이 아름다운 모스크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건축가가 그녀를 사랑해서 키스한 일이 밝혀지자 그 건축가는 도망치고 비비하눔은 건물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이 건물만 화려하고 옆에 다른 건물은 재건, 복구가 안 된 채 방치되어 있어 안타까웠다.

레기스탄 광장~매주 3회 밤에 '소리와 빛의 제전'이 열리고 사람들은 광장에서 야경을 감상하며 즐긴다

부하라 가면서 들린 이슬람 수피사원


종교적 수행은 은둔이 아니라 대화와 선행에 있다는 이슬람의 균형 있는 가르침인 듯하다

수공예품이나 세밀화등 그림이 판매되고 있는 옛 궁전마당


칼란 광장의 멋진 야경

부하라 옛 마드라사에서의 전통음악과 춤 공연

중세의 무덤 이스마일 사마니 묘~전체건물의 네모형과 입구 네모는 이슬람 메카의 카바를 딴 것이고 입구문 상단의 둥근 태양은 불을 중시한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인도랑 가까워 쿠샨왕조의 불교적 형태까지 융합된 10세기 문화적 복합물인 무덤이다.

저 파란 타피스리를 기어이 사고야 말았다~집에 와서 광목천을 더 대어 작은 요처럼 사용하고 있다. 나에게는 볼 적마다 실크로드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귀한 선물이 되었다.

시장에서 천을 떠서 이렇게 요처럼 만들어 내 방에서 카펫 대용으로 쓰고 있다

사마르칸트 시압시장의 배추,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인 이곳으로 강제이주당했던 고려인들, 이곳에서 쌀농사를 시작했고 무가 없어 당근김치를 담가먹던 그들에게 이젠 이런 배추가 있으니 김치걱정은 없겠다 싶었다

시압시장 야채코너, 이곳의 샐러드나 수프에도 고수가 많이 들어간다. 싱싱한 야채들, 날씨가 너무 더워서 하우스 안에서 시원하게 재배하기도 한다 한다. 이곳 오이는 오이 원산지답게 오기가 작으면서도 아삭한 식감이 더 맛있다. 

부하라 왕이 하루 5번 기도를 했다는 곳, 기도하면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다고 어린이사원이라고도 한다.


실크로드 그 시절을 떠올리는 대상들의 행렬

부하라 아르크 성 사원 ~Ark 성은 부하라의 왕들이 거주했고 7세기에 처음 축성된 이후로 몽골, 투르크등 수 차례의 침략으로 파괴와 재건의 역사를 반복했다.

아르크성 왕의 대관식이 이뤄지던 곳이자 외국 사절들을 맞이하던 곳이기도 했다

문양이 섬세한 아르크성 박물관의 주전자

견고하게 쌓아 올린 둥근 아르크 성벽


칼론광장의 모스크 마드라사 미나렛 삼총사

방탄을 좋아하는 소녀들을 만나 모스크 앞에서 사진도 찍고 ㅎㅎ

부하라의 시장과 골목에는 카펫, 전통의상과 기념품, 그림을 파는 곳이 많았다. 2 천 년 전 실크로드 시작부터 유통되던 품목들을 지금도 보니 놀랍다. 나는 실크로드가 그려진 세밀화 1장을 내 수중의 거금을 주고 샀다.

부하라 옛 마드라사에서 민속음악과 전통무용 디너쇼

부하라 전통음식 맛보기와 민속춤 관람하기


신발이 반쯤 벗겨진 호자시인 ㅎㅎ

우즈베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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