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존스 대학교 토의 수업에 참여하며 깨달은 것
나는 내 목소리를 찾고 싶어서 세인트 존스 대학교에 왔다. 모든 수업이 토의로, 참여형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이곳에서 나는 내 목소리를 찾을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타인의 의견 따르기를 좋아하고,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습관적으로 끄덕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책 읽고 토의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토의 수업에서 말을 많이 하고, 토의를 이끄는 그런 목소리를 가지지 않았다는 걸. 나에겐 나만의 목소리가 있다는 걸.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토의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크게는 세미나(세인트 존스 독서 토의)가 진행되는 두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학생, 두 시간 동안 한 번 말 할까 하는 과묵한 학생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고, 세부로 나누어보면, 마치 단순 재미가 목적인 듯 즐기는 학생, 토의 내내 노트에 필기하며 생각에 잠기는 학생, 말하는 이를 바라보며 경청하는 학생, 궁금한 게 생기면 남의 말을 끊더라도 묻는 학생, 상대방의 발언이 일으키는 혼란이 있어도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여 질문하기를 망설이는 학생, 책을 꼼꼼히 읽어서 어떤 문장이 몇 페이지에 있는 지 바로 찾는 학생, 세미나를 진행하려 하는 학생, 다른 학생의 의견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질문하는 학생,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질문 할 타이밍만을 기다리는 학생 등등.
시험보면 점수가 나오고, 그 점수로 여러 학생을 비교하고 성적 매기기는 참 쉽다. 고민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시험 점수가 그 학생의 노력, 성실도, 이해도를 반영한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토의 수업은 다르다. 토의 중심 수업에서 학생을 평가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학생을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은 ‘참여도’이다. 얼마나 책을 꼼꼼히 잘 읽었는 지, 내용을 얼마나 숙지 했는지, 얼마나 수업에 진지하게 임하는 지를 평가하기 가장 쉬운/편리한 잣대는 발언 횟수다. 발언 횟수는 누구나 셀 수 있기에, 부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아니기에, 명백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해를 잘 했다는 것도, 열심히 한다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발언 횟수가 적다고 해서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사람 성향이 여기서 되게 크게 작용한다. 말을 많이 하는 성향의 학생,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질문하는데에 있어 덜 두려워하는 학생이 있는가하면, 소심하고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말하기 보다는 듣기가 좋고, 오래 생각해서, 수십 번 머릿속에서 곱씹어 본 질문만을 나누고 싶은 그런 조심성있는 학생도 있다. 토의 수업 평가의 한계를 고려하여,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는 ‘돈래그’라는 고유 평가 방법을 만들었다. 매 학기 말 열리는 ‘돈래그’에서 학생은 교수님들과 마주앉아, 교수님께서 구술로 한 학기동안 수업에서 보인 나의 모습을 평가하시는 걸 듣는다. 성적표에 적힌 알파벳 A, B, C가 말해주지 못하는, ‘나’라는 한 사람에 대한 깊은 평가를 듣게 되는 특별하고 값진 시간이지 않을 수 없다. 나를 A로, B로, C로 보는 게 아니라, 나를 한 사람으로, 인격체로, 나의 성향과 나의 배경을 고려하여 평가 해 주신다는 것이다.
사람의 성향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성격 유형 테스트도 수만 가지, 성격 유형도 수만 가지이다. 모두가 한 부류의 학생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개성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구분짓는, 특별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타인의 개성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 생각에 몰두하다가 나의 개성을 개발하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다른 개성과 성향을 타고났고, 그건 인간에게 축복이다. 만약 모두가 같은 성향을 가지고, 모두가 말하기를 좋아하고, 모두가 토의을 진행하려 든다면, 원활한 토의의 장이 만들어 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경청하고 깊게 생각하여 참여를 어려워 하는 모습이라면, 그것도 생산적이진 못할 것이다. 각자 가진 성향을 기반으로 다소 다른 방향의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각자가 꿈꾸는 자신의 최고 모습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수업에서 가장 많이 말 하는 학생이 되기를 바라며, 내가 가지지 않은 목소리를 탐내며 스스로를 자책하기 보다, 나에게 주어진 목소리를 잘 가꾸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