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홍콩 북부, 그리고 마카오
홍콩이란 곳이 알짜배기만 보면 이틀이면 충분히 웬만한 곳을 다 갈 수 있는데, 여유롭게 지내자고 마음먹으면 또 한없이 오래 있을 수 있는 곳 같다. 예전에 홍콩의 부동산 다큐에서 사람들이 쪽방, 닭장 같은 집에서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왜 그렇게까지 홍콩에 살려고 하나, 주변 선전이나 아님 좀 더 올라가면 같은 금액으로 훨씬 잘 살 수 있는데'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며칠 있어보니 도시의 화려한 야경과, 낡은 건물, 시장들, 건물에 걸려있는 빨래들…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서 떠나기엔 너무 매력적인 도시였다.
사실 웬만한 곳은 다 돌아본 지라, 여유롭게 홍콩 도심이 아닌 살짝 외곽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황대선사 가는 길에 마침 초이홍 아파트가 있길래 초이홍 아파트를 가보았다. 예상대로 그냥 아파트 단지였는데, 농구코트의 화려한 색감, 무지개 아파트의 색감, 단지의 나무들, 그리고 창문에 빽빽하게 걸려있는 빨랫감들이 다채로우면서도 또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사진에 취미를 붙였더라면 여기에선 정말 신나게 사진을 찍어댔을 것 같다. 농구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농구코트 근처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내가 어렸을 때 주택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던 어린 시절도 생각이 났다.
홍콩 외곽으로 오니 길에 보이는 아파트는 역시 높지만, 홍콩 도심만큼이나 사생활이 겹칠 정도로 빽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90년대 신도시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아파트들을 지나쳐 황대선사에 왔다. 역시 도교신사라 여기도 관우 (도교에서는 경외의 뜻으로 '관성대제'라고 한다)와 부처님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거나, 운세통을 들고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사주나 타로를 보고, 부처님이나 예수님께 기도를 하지만 여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도교신에 대한 신앙이 깊어 보였다. 무릎을 꿇고 간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이 사람들은 어떤 염원이 있어서 이토록 많이들 간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침사추이로 와서 어제 만난 동생한테 추천받은 '킹스로지'라는 레스토랑을 가보았다. 홍콩의 전형적인 음식점답게 처음에 따뜻한 차를 내왔다. 홍콩은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일단 따뜻한 차를 내오고 찬 물은 따로 요구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파두부에 쌀밥을 시켰다. 마파두부가 한국보다 매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과 다르게 약간 딱딱한 두부가 아니라, 약간 좀 더 연두부에 가까운 식감으로 살짝 달달하면서도 매콤한 맛, 그리고 다진 고기와의 궁합이 정말 일품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본 마파두부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배를 두둑이 채우고 지금까지 꽤나 걸은지라, 발 마사지를 받기로 하였다. 근처를 배회하다 보니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 있어 들어갔더니 팁을 따로 또 주어야 한다고 한다. 뭔가 당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아서 괜찮다고 하고 나왔다. 괜찮은 데를 찾아야겠다 싶어 침사추이 주변에 마사지샵을 검색하다가 구글 평점이 4.0이 넘는 bodyzone massage shop이라는 곳을 찾아 들어가게 되었다. 마사지사가 아주머니라 힘이 세질 않을 것 같았는데, 힘과 스피드가 매우 좋으셨다. 처음에 따뜻한 물로 씻겨주시더니 한국에서 받던 속도의 1.5배 정도로 종아리와 발바닥 이곳저곳을 눌러주시니 정말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노곤노곤하고 기분 좋은 상태로 1시간을 받다 보니 어느새 끝나있었다.
이제는 홍콩섬과 반도를 어느 정도 돌아다닌 것 같아서, 이곳을 떠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한 대로 마카오를 가기 위해서 china ferry turminal에 갔는데, 페리는 더 없고, 고속버스만 있다고 한다. 원래는 페리를 타고 가고 싶었다만, 버스를 타고 강주아오 대교를 가는 것도 괜찮은 경험일 것 같아서 흔쾌히 타기로 하였다. 아까 황대선사를 가려고 반도 위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침사추이로 내려온 것인데, 결국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가서 란터우섬을 거쳐서 마카오까지 가야 했다.
버스표를 구매하니 마카오 타이파까지 간다는 스티커를 내 옷에 붙이라고 한다. '내가 무슨 병아리반 학생도 아니고 유치하게 이런 걸 왜 옷에 붙이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 붙이고 있었는데, 버스를 보니 모두가 다 스티커를 가슴팍에 붙이고 있었다. 나만 안 하면 이상해 보여서 결국엔 나도 따라서 붙이게 되었다. 곧 알게 되었는데, 붙이지 않으면 큰일 날 뻔했다.
우선 말하자면 홍콩에서 가는 버스는 페리터미널에서 타고 쭉 마카오 타이파까지 가는 것이 아니다. 홍콩 출입국심사장이 홍콩 공항 근처인 란타우 섬에 있기 때문에 란터우쪽까지 가서 심사를 위해 버스에서 먼저 내려야 한다. 홍콩이 중국과 다르게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도록 특별행정구로 지정되었기에 나가는데도 일종의 출입국 심사가 필요한 것이다.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면 아까 왔던 버스를 타는 것이 아니다. 출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나면 버스가 여러 대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붙인 스티커를 보고 직원들이 '몇 번에 가서 저걸 타세요' 해준다. 알아서 날 찾아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한테 가서 무엇을 타냐고 물어봐야 한다. 멀뚱멀뚱 있으면 버스가 그냥 가버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게 새로운 버스를 타고 길디긴 강주아오 대교를 건넌다. 영종대교를 건너고 인천공항을 가는 것과 뷰가 흡사했으나, 훨씬 긴 것 같았다. 어느새 해가 져서 어스름이 끼었을 무렵 마카오 본토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입국심사를 위해 내려야 했고, 내가 가려는 타이파를 가기 위해서 새로운 버스를 찾아야 했다. 물론 직원들이 친절하게 '이걸 타세요' 해주진 않았기 때문에 물어물어 타이파 가는 버스 타는 곳을 찾았는데, 그새 버스가 가버린 것이다 (!). 옆에 버스 기사님한테 타이파 가는 버스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 방금 막 갔다고 하신다. 아무리 마카오땅이 좁아도 터미널에서 일단 시내는 나가야 하는데, 이거 택시를 불러야 하나 생각하던 참에 20분 후에 온다고 하신다. 보통화로 어느 호텔에 가냐고 하시니 베네치아 호텔에 간다고 이야기했다.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에 나 같은 처지의 중국인이 한 명 더 있었다. 셋이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중국어를 잘 못해서 거의 말을 안 했지만), 기사님이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기다리라고 하신다. 당연히 비흡연자라 담배는 안 피운다고 말씀드렸지만. 여하튼 새로운 버스가 와서 타이파로 갈 수 있었고, 버스는 무료였다.
여기서 마카오 지형에 대해서 간단히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마카오는 땅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고, 인구밀도가 매우 높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채 100만이 되진 않는다. 입국심사장이 있는 반도, 타이파 섬, 콜로안 섬 이렇게 크게 3개로 이루어져 있다. 반도 쪽은 옛 청사나 요새 등등 실제 포르투갈 행정이 이루어진 곳이 많고, 타이파 섬은 카지노가 많고, 그리고 콜로안은 옛 포르투갈 치하 시기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많다. 우선 타이파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타이파에 있는 유명한 카지노를 돌아보기로 결심을 하고, 베네치아 호텔부터 들어가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카지노가 강원랜드를 제외하고는 불법인지라 카지노는 처음 들어가 본 것이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듣기는 하였으나 호텔 크기는 정말 궁전 하나를 지어놓은 것 같았다. 내 느낌상이지만 건물 크기만 보면 아마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클 것도 같았다. 실제로 투숙하는 객실도 많지만, 호텔 1층 중앙에 떡하니 굉장히 큰 카지노가 있었다. 중앙에 있기에 1층 어디에서도 출입이 쉽게 만들어놓았으며, 입구마다 가드를 배치해 놓고 신분증 검사를 하고 있었다. 여권을 보여주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분위기는 쾌적하였다. 야쿠자들이 많거나, 간간히 깽판을 치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화를 내지도 않고, 즐거운 표정을 짓지도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카지노를 하고 있었다. 특히나 등산복을 입은 50대 정도 아주머니, 아저씨들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는데, 다들 1000 달러 (17만 원) 짜리 칩들을 몇 개씩 한판에 1분 정도 걸리는 바카라에 걸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 행색은 이리도 남루한데, 본업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다들 중국에서 한자리하는 기업 간부나 회장님들 아닌지…
기왕 온 것 아무것도 안 놀고 가기엔 아쉬워서 슬롯머신을 조금 돌려봤는데, 슬롯머신도 나 같은 서민이 놀다 보니 쉽게 돈이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100 달러 정도를 돌려보니 몇 번 누르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100 달러 정도로 룰렛도 돌려봤다. 원판을 돌려서 공이 0부터 36까지 쓰여있는 숫자 중에서 공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맞히는 게임인데, 숫자 하나당 10달러를 걸 수 있었고 맞히면 36배를 가져가게 된다. 그러면 확률상 대략 10/37로 돈을 벌 수 있는데… 결과는 꽝이었다. 역시 도박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
호텔 카지노라고 해서 카지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상점가가 있는데, 시계, 옷 등을 파는 명품샵부터 시작해서 나이키나 뉴발란스 같이 무난하게 살 수 있는 샵들도 있었다. 아마도 '돈을 땄으면 여기서 쓰고 가세요' 하는 의도로 만든 것 같다. 상점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레고 매장도 있었고, 에그타르트 집도 있었는데, 맛이 꽤 좋은지 사람들이 제법 줄도 서 있었다. 상점가 중앙에는 베네치아 호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로를 파놓고 곤돌라까지 있었다. 밤이라 그런지 곤돌라를 타는 사람은 없었는데, 낮에는 뱃사공도 따로 있어서 타볼 수도 있는 것 같았다. 호텔 안에 카지노가 있고, 상점가도 있고, 수로를 파놓고 곤돌라까지 안에서 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시간을 보니 오후 8시쯤 되었는데, 이곳은 창문도 없을뿐더러 상점가 천장에는 심지어 인공으로 하늘까지 조성해 놓아서 밤인데도 마치 낮에 돌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도 낼 수 있다. 이곳은 작은 하나의 도시 같기도 하다. 음식점들도 물론 있고, 지나다 보니 맥도날드가 있어서 마카오의 맥도날드도 맛볼 겸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홍콩도 그렇지만, 여기도 뉴진스가 제법 인기가 있나 보다. 뉴진스 입간판이 서있고, 뉴진스 콜라보 메뉴도 있었다. 한국에서 어딜 가도 뉴진스 광고를 볼 수 있는데, 이곳도 이제 뉴진스에게 지배당한 것이다.
무난하게 빅맥 세트를 시키고 음료를 과일 에이드로 바꿨다. (이름은 정확지 않다.) 사이다에 파인애플+열대과일 통조림을 섞은 비주얼인데, 맛도 딱 그러했다. 익숙한 맛을 즐기면서 혼밥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 앉은 여자 한 명이 갑자기 나한테 속사포로 말을 건다.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워서 중국어인지 광동어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뭔가 싶어서 얼빠지게 있다가 영어로 알아들을 수 없으니 영어로 말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상대쪽에서도 막 웃으면서 손사래를 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옆에 그 사람 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그 친구도 막 웃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너무 궁금하여 궁금하다고 말하니까 웃으면서 연신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한다. 이럴 때 중국어라도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베네치안 호텔을 나오니 도시가 화려했다. 홍콩처럼 여러 고층 빌딩들로 덮힌 화려함이 아니라, 비슷하지만 웅장한 호텔들로 인하여 화려했다. 버스를 타려 우연히 타이파타운에 들렸는데, 유럽에서처럼 차도에는 돌들이 깔려있고, 유럽풍 건물들이 이어져있고, 은은하게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순간 유럽에 온 것 같은 기분이 잠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