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제주
봄의 제주. 움이 트고 세상이 연한 초록빛으로 변해갈 시기에 제주를 가면 그렇게 좋다던데, 그동안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사람이 붐비는 것을 원체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학생 신분으로 방학에 맞춰 여행 일정을 짜다보면 항상 여름과 겨울에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인이 되어서 좋은 점이라고 해야 하나? 가고 싶은 계절에 휴가를 쓰고 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되어, 봄의 제주를 만끽하고 왔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예정이라고 해서 날씨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3월 중 가장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기분이 잔뜩 좋아져 플레이리스트에 여행,주말 가사가 잔뜩 적힌 노래만 담아 렌터카에 틀고, 근처 바다로 향했다.
철분이 함유되어 모래가 검은 색인 삼양해수욕장에는 맨발걷기와 지압운동을 하는 주민들이 많아, 해수욕장보다는 도를 닦는 계룡산에 가까워보였다. 맨발걷기는 뒤처리가 어려울 것 같아 손으로 모래를 만져봤는데 너무 보드랍고 따뜻해서 마치 닥스훈트 미니어처 배를 쓰다듬는 기분이 들었다. 바다 색도 모래를 머금은 듯 약간 검은 색이었는데, 사이사이 하늘이 비춰 오묘한 느낌이었다.
바다를 실컷 구경한 후, 주요 목적지인 안돌오름으로 향했다. 안돌오름은 해가 질 때 예쁘다고 해서 부지런히 향했는데, 저녁부터 구름이 스물스물 올라와 석양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입장료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오름을 오르는 게 아니라 오름 밑에 있는 숲을 꾸며놓았던 모양새였다. 오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드넓은 잔디밭에 염소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염소에 관광객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며, 저 염소가 사람보다 더 대단한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둘째날 아침은 이슬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산방산 어래 유채꽃밭이 있다고 해서 바람을 뚫고 도착했는데, 종자가 조금 다른 듯한, 내 키만한 유채꽃밭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두더지처럼 머리만 내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행복해보였지만, 천원씩 입장료를 받는 밭의 주인분이 가장 행복해보였다. 주인의 미소를 거름삼아 유채꽃이 더 노랗고 푸르게 자란 것 같았다. 그야말로 천원의 행복이었다.
서귀포에서 시장에 잠시 들린 뒤, 제주 바다를 한번 더 보러 한라산을 넘어갔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기준으로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뉘는데, 구름이 한라산에 갇혀 한쪽이 비가 오면 다른 한쪽은 비가 오지 않을 때가 있다고 했다. 거짓말처럼 제주시로 넘어가자 하늘이 개고 저녁이 되어 채도를 연하게 입은 노란 윤슬이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금능 해수욕장과 바닷길은 세찬 바람이 불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석양을 품어 새틴처럼 빛났다. 마치 외국의 바다를 보는 듯했다.
제주를 여러 번 여행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여행은 고등학교 2학년때 다녀온 가족여행이었다. 무계획으로 떠났는데 가는 식당마다 맛집이었고, 날씨도 쾌청해 행복한 기억만 있던 여행이었다. 금능과 애월이 이어져 있어, 기억을 더듬어 애월 해변로를 달리다가 그때 먹었던 망고주스 집을 발견했다. 추억회상 겸 다시 사먹었는데, 맛은 변함 없었지만 지난 시간만큼 오른 가격을 보며 그만큼 변한 나의 모습도 조금 씁쓸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은 제주공항에 가기 전까지 특별한 계획을 세우진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돌아다녔는데, 점심을 먹으러 간 법환동에서 예쁜 빵집을 발견했다. 옛날 동화에 나올 것 같은 작은 빵집이었는데, 이름 모를 노란 꽃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가 있었다. 빵집 주인분께 여쭤보니, 호주 아카시아라고 했다. 아카시아 향기는 거의 나지 않았지만, 그 노란 모습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두는 힘이 있었다. 법환동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아카시아, 내가 보고 싶었던 봄의 제주가 이 모습이었구나- 싶었다.
노란 빛으로 가득했던 봄의 제주. 노랗게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