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여신과 함께, 여수

국내여행, 여수

by jiya

직장을 잡고, 유독 불평을 많이 하게 되었다. 불평을 늘어놓을 환경이기도 했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걱정이 스물스물 올라오던 찰나였다.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며, 마침 역마살 이야기까지 들어, 긴 연휴를 핑계삼아 1박2일 여수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해외는 값이 비싸고 제주도는 비행기 표가 없어 차선책으로 선택했던 장소인데, 의외로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다:)

국내 여행을 다닐때는 일부러 여행 계획을 얼기설기 짜 놓곤 한다. 완벽하게 짠 계획을 한번도 완벽하게 지켜낸 적이 없었을 뿐더러, 간혹 우연에 의한 사건이 더 행복한 기억으로 남곤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꼭 가보고 싶은 장소 빼고는 여유롭게 비워두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바다로 달려갔다. 여행하는 내내 날이 눈부시게 좋아, 어느 바다를 보아도 윤슬이 비쳤다. 여수 바다는 바다라기보다 호수에 가까웠다. 잔잔하고, 옥빛이 나고, 물이 맑아 물고기도 여러마리 보았다.

이번 여행의 메이트는 남동생이었다. 남동생과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남매끼리 여행을 갈 수가 있구나”였다. 사실 우리도 남매여행이 처음이었는데, 비교적 쿵짝이 맞는 편이라 싸우지 않고 잘 돌아다녔다.


여행 계획을 짤 때 동생이 가장 가고 싶어했던 곳은 아르떼 뮤지엄이었다. 처음에는 굳이 가야하나 싶었던 장소였는데, 미디어아트가 생동감 있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코스가 짧아 반대로 한번 더 돌다가, 동생이 너무도 보고 싶어했던 고흐 전시회까지 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연의 여신은 여행 내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해 질 무렵, 여수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여수 밤바다를 보러 하멜등대로 향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케이블카를 타는 것이었는데, 연휴에 인파가 몰려 타지 못하고 대신 유쾌한 택시 기사님과 만나게 되었다. 케이블카를 지금 타려고 해도 2시간은 기다린다며, 연휴라 택시도 안잡히니 돌아갈 때는 걸어서 버스를 타라고 안내 해주시고, 여행 일정을 듣고선 아침 택시까지 예약해주셨다. 우연의 여신이 뜻밖의 만남을 주선하며, 여행의 묘미를 선사했다.

둘쨋날은 미리 예약된 택시 기사님의 말을 따라 예정보다 빨리 향일암으로 향했다. 외길이라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차가 밀렸는데, 숙소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기사님의 유머와 설명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여수에 섬이 몇 개 있는 줄 아셔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숫잔데, 맞히면 내 택시비 깎아준다.” “음..365개요?” “아니 정답을 맞혀부렸네. 손님 중에 아무도 못 맞혔는데. 근데 설명비가 있으니까 택시비는 좀 봐줘요.” 때아닌 퀴즈타임까지 벌이니, 택시가 90도로 꺾여 들어가아 올라갈 수 향일암 주차장까지 금새 도착했다.

향일암은 여행 계획을 짤 때 내가 가장 가고 싶어했던 장소였다. 경치도 경치지만, 동굴을 여러개 지나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올라가 소원을 빌고, 눈을 떠보니 앞서 빌었던 소원마저 까먹을 정도로 찬란한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의 옥빛은 엑스포역 바다와는 또 다른 색이었다. 조금 더 연한 에메랄드 빛에 가까웠는데, 아침 공기마저 상쾌해 영원히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향일암에서 내려와 이순신광장으로 향하려는데, 이전까지 즐거웠던 택시 기사님과 갑작스레 이별하게 되었다. 시내까지의 운전은 차가 밀려서 곤란하다는 듯, 짚라인을 타는 호텔 근처에 내려주시곤 떠나 가버리셨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다~ 어딜가야 할까~” 곤란한 상황에 처했어도 이마저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라며 열심히 걷고, 무사히 시내까지 도착했다. 여행을 하면 절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듯 했다.

비록 우리를 버리시긴 했지만, 날씨가 좋으니 오동도 대신 레일바이크를 타라는 기사님의 말을 유언처럼 삼아 점심을 먹고 레일바이크로 향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레일바이크는 여수 북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 바다는 짙은 옥빛을 띄고 있어 동해와 비슷해보였다.


레일바이크는 동굴도 지나가서, *그린고트에 들어가는 도깨비를 연상케했다. 깔깔거리며 열심히 바이크를 타니,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바람의 이름이 행복이구나, 생각했다.

레일바이크 바로 앞에 해변이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모래가 검은 색을 띄어 만성리 검은모래 해수욕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었다. 만성리의 물은 분명 레일바이크와 같은 물일텐데도 조금 더 어두운 옥빛이었다. 여수는 모든 바다의 물빛이 다른 듯했다.


크고 납작한 돌을 찾아 물수제비도 하고, 카페 구석진 곳에서 휴식도 취하니 오후가 모래처럼 사라졌다.

끼니를 해결하려면 필연적으로 이순신광장을 들러야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마지막에는 도망치듯 기차역으로 피신을 했다. 스카이타워라는 야경 전망대를 별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마지막까지 우연의 여신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맑은 하늘에 반짝이는 야경과 멀리서 보이는 불꽃놀이는 돌아가야 하는 일상에 빛을 뿌려주듯 잔잔히 떠 있었다.


옥빛을 띄는 우연의 여신과 함께한 여수, 지친 삶의 한켠에서 오래도록 에메랄드 색으로 빛날 것 같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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