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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야 Feb 02. 2024

"비 오는 거 참 싫다."

입버릇처럼 비가 올 때마다 말하곤 했다.

나는 전형적인 雨女다. 일 년에 채 몇 번 되지 않는 약속을 잡으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집밖으로 나올 때 세차게 내리던 비는 건물 안에 들어가면 기세가 옅어지고, 한 발만 내디뎌도 다시 힘차게 내리기 일쑤였다. 비가 오는 날에 집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폭닥한 담요 속에서 책을 읽는다던지, 조용한 빗소리를 들으며 선잠에 든다던지 하는 기억들만 쌓였다면 나도 비가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내게는 날씨가 흐려지고, 기온이 내려가서 춥고, 양말까지 스민 습기에 발이 축축해지고.. 라며 하루 종일 이야기 할 수 있는 음울한 기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가 올 때마다 내뱉던 싫다는 말은, 어느새 내가 비를 싫어하는 것인지 비가 나를 싫어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너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몰래 따라 하려 했던 그 시절의 나는, 빗소리가 좋다는 너의 말에도 도무지 '비'라는 녀석만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메아리처럼 반복되곤 했다. 비가 올 때마다 속삭이듯 자동으로 재생되는 빗소리가 좋다는 그 말에, 어떻게든 나도 좋아하보려 열심히 빗소리를 따라다녔다.

여느 때처럼 축축한 기운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던 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가로등이 서 있었다. 마치 너처럼 키가 큰 가로등이, 따뜻한 주황색 빗방울을 천연히 흩뿌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비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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