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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야 Apr 13. 2024

신분의 힘

모교로 교생실습을 갔을 때였다. 학교는 익숙한 듯 낯설었다. 때가 묻은 책상과 사물함은 조금 작아 보였고, 기운이 넘치는 학생들의 입김으로 인해 뜨거운 공기가 주위를 맴돌았다. 숨을 한 모금 들이마셔 보니, 짭짤하고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언제 이런 열기를 맛봤더라. 입 속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교사인 듯 교사가 아닌 기분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빨리하거나 더듬고 마는 나는(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자신감으로 교사를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첫날부터 뚝딱거리고 삐그덕 댔다. 그래도 수업 준비는 재미있었다. 또 다른 내가 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뚝딱이 선생님이 불쌍해서일까, 학생들은 마음보다 열기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학교에는 나 이외에도 실습을 온 학우가 2명 더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말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사이었지만, 상황이 주는 특수성 때문인지 언젠가 스르르 녹아버릴 얕은 유대감이 금세 형성됐다. 신분의 힘으로 처음 얽힌 관계 유형이었다.

학교라는 사회는 생각보다 작아서 같은 학교로 재발령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실습을 했던 학교에도 스승이셨던 선생님이 몇 분 계셨다. 교사의 신분으로 나의 교사를 마주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 반가운 기색이었지만 때로 따뜻하지 않은 눈동자를 마주하곤 했는데, 아마 모든 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마음 때문인 것 같았다. 신분은 관계를 특이하게 발전시키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기묘한 경험은 한 스승님을 통해 정점을 찍었다. 주요 과목이 아니라서 오랜 시간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기억에 남는 분이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선생님께 수업도 들었었는데. 잘 지내셨어요?" 반가운 마음에 친근하게 말을 붙였는데, 돌아온 대답 속에는 미세한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졸업생이 교생으로 온다는 소식 들었어요. 아, 제가 가르쳤었군요. 남은 기간도 잘 있다가 가요."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따뜻한 대화였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어쩐지 실망한 기분이었다.


교생실습이 끝난 지금도, 때로 그때의 실망감을 곱씹어보곤 한다. 실망의 근원은 대체 어디일까. 미묘하게 느껴진 거리감일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의 향수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신분이라는 갑옷을 멋대로 몸에 휘감고 드디어 내가 어른이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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