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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꽃봉오리와 은퇴

인생의 꽃봉오리, 은퇴 이후(1)

  

     

  아! 나도 몰랐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글을 쓰게 될 줄. 노년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될 줄. 하지만 연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하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줄곧 성공보다 삶, 돈보다 삶, 생활보다 삶, 정보보다 삶, 일보다 삶에 천착하며 살아왔는데, 아마도 그 이력이 이 글을 쓰도록 내몬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부터 ‘삶주의자’를 자칭하고 살아오면서 진짜 삶을 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은퇴 이후라는 자각, 진짜 삶 이야기는 은퇴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을 얻었는데, 아마도 이런 자각과 통찰이 이 글을 쓰도록 내몬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5년 전 간경화로 투병할 때, 죽음의 가능성 외에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을 때 ‘행복’이라는 화두에 붙잡혀 [행복을 살다]라는 책을 썼듯 60대 중반이 된 나는 지금 ‘은퇴’라는 화두에 붙잡혀 이 글을 쓴다. 보통의 은퇴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은퇴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미시역사 연구의 선구자 시어도어 젤딘은 [인생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말한다. 

  “우리는 일상의 중압감에 눌려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대화를 회피할 때가 많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장 적게 논의한다.”(53쪽) 

  정말이다. 나도 살면서 뼈저리게 경험했다. 때때로 소설, 드라마, 영화, 책, 다양한 예술을 통해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마주하긴 하나 일상에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 대화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끽해봐야 정치 이야기나 떠도는 정보를 말하는 정도이고, 나머지는 그렇고 그런 연예인 이야기나 누군가를 까는 뒷담화나 시시껄렁한 신변잡담을 늘어놓기 일쑤다. 누군가가 좀 심각하게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꺼내려 하면 ‘야, 인생 뭐 있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 뭐!’라며 딴전을 피우거나 귀를 닫아 버리곤 한다.


  은퇴 문제도 그렇다. 은퇴는 생애 주기에서 가장 심원한 대전환의 사건인데도 고작 은퇴 자금을 모으고 불리는 방법, 노인 일자리 문제와 노인 빈곤 문제, 노인 건강 문제를 말할 뿐이지 은퇴가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은퇴 이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은퇴 이후의 삶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은퇴 이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지를 깊이 고민하거나 논의하는 것은 못 봤다. 선후배 목사들이 은퇴 문제로 대화하는 걸 들어봐도 돈 문제와 건강 문제가 오갈 뿐 그 이상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참 아쉽다. 인생의 대사건인 은퇴에 관해, 삶의 꽃봉오리인 은퇴 이후의 삶에 관해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처연하다. 그렇다고 현실을 탓하며 푸념만 늘어놓는 것도 이 나이에 할 일은 아니다 싶다. 하여, 글 쓰는 고달픔을 각오했다. 은퇴에 관해 조금은 속 깊은 이야기를 해보기로 작심했다. 그동안 삶주의자를 자칭하며 삶의 속내에 호기심 가득한 촉수를 뻗치고 살아왔으니 할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진실 탐구의 왕도는 단연 물음이다. 반대로 우리의 삶이 찌그러지고 궁색해지고 망조가 드는 이유는 99%가 물음이 없어서다. 그러니 묻자. 묻자. 묻자. 은퇴란 인생에서 무엇일까? 왜 은퇴라는 삶의 매듭이 필요할까? 은퇴라는 매듭 없이 살면 어떨까? 이 물음을 시작으로 은퇴라는 숨은 광맥을 파 들어가 보자. 

  이 물음을 제대로 파 들어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생애 주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그냥 살지 않는다. 인생이란 게 무작정 흘러가지 않는다. 인생에도 나름의 단계가 있고 주기가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크게 세 단계를 거친다. 배움의 단계. 노동의 단계. 존재의 단계. 


  각 단계의 특징을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배움의 단계 : 학습의 시기(20-30년)-삶 준비기–의존의 시기–상대가 주체-나와 세계가 미분화 

*노동의 단계 : 노동의 시기(20-40년)-삶 체험기–독립의 시기–내가 주체-나와 세계가 분화

*존재의 단계 : 삶의 시기(20-40년)-삶 향유기–상호의존의 시기–우리가 주체-나와 세계가 하나     


  이것은 좀 풀어서 말하면 이렇다. 

  인생을 삶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배움의 단계’는 삶을 준비하는 ‘삶 준비기’라 할 수 있고, ‘노동의 단계’는 일에 분투하며 삶의 이모저모를 겪어내는 ‘삶 체험기’라 할 수 있고, ‘존재의 단계’는 삶의 신비에 눈뜨고 삶의 진미를 누리는 ‘삶 향유기’라 할 수 있다. 

  인생을 내적 성장의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배움의 단계’는 부모나 사회에 의지하는 ‘의존의 시기’라 할 수 있고, ‘노동의 단계’는 자기 힘으로 삶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독립의 시기’라 할 수 있고, ‘존재의 단계’는 만유와 만인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더불어 살 줄 아는 ‘상호의존적 시기’라 할 수 있다. 

  인생을 삶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배움의 단계’는 상대방이 삶의 주체인 상태라 할 수 있고, ‘노동의 단계’는 자기가 삶의 주체인 상태라 할 수 있고, ‘존재의 단계’는 우리가 모두 삶의 주체인 상태라 할 수 있다.

  인생을 나와 세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배움의 단계’는 나와 세계가 미분화된 시기라 할 수 있고, ‘노동의 단계’는 나와 세계가 분화의 시기라 할 수 있고, ‘존재의 단계’는 나와 세계가 하나인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생애 단계마다 삶의 내용이나 방식에 차이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노동의 단계에는 배움의 단계에 살던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존재의 단계에는 노동의 단계에 살던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각각의 생애 단계마다 그에 걸맞은 삶의 내용과 방식을 따라 살아야 인생이 풍성할 수 있다. 물론 배움의 단계에서만 배우는 것 아니고, 노동의 단계에서만 일하는 것 아니다. 하지만 단계별로 삶의 내용이나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게 좋고, 단계마다 그에 걸맞은 삶의 내용이나 방식을 따라 사는 게 바람직하다. 존재의 단계도 예외가 아니다. 존재의 단계에는 노동의 단계와 구별된 생각과 태도로 나와 너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이것은 꼭 삶주의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인데,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삶을 위해서다. 그것이 배움이든, 일이든,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인기든, 집이든, 빌딩이든, 건강이든. 조금만 생각해보라. 이런 것들이 삶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돈이 삶을 부패하게 한다면 그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건강이 삶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건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직 삶을 세우는 돈만이 의미 있고, 삶에 이르는 건강만이 의미 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의 꽃봉오리는 결국 삶이다. 그리고 인생의 꽃봉오리인 삶은 존재의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탐스럽게 피어난다. 그 이전 단계라 해서 아예 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탐스럽게 피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오직 마지막 존재의 단계에 이르러야 삶의 꽃봉오리는 탐스럽게 피어난다. 


  흔히 배움의 단계에 있는 청춘의 때를 일컬어 인생의 황금기요 꽃봉오리라고들 한다.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착각이다. 삶을 준비하는 배움의 단계나 독립적 주체로서 일하는 노동의 단계에 있는 삶은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하다 해도 아직 꽃봉오리는 아니다. 인생의 진짜 꽃봉오리는 존재의 단계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탐스럽게 피어난다. 

  철학자 김형석 명예교수는 자신의 100년 인생길을 돌아보면서 인생의 노른자위가 65세에서 75세였다고 회고한다. 그때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어느 신문 기자가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나이로 되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에도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때는 생각이 얕았고 행복이 뭔지 몰랐다’며 ‘60세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했다. 과연 100년을 산 철학자답다. 존재의 단계를 살아 온 사람답다. 

  예수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고린도후서4:16)고 말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한 편지에서 “나의 노년은 피어나는 꽃입니다. 몸은 이지러지고 있지만 마음은 차오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옳다. 삶의 꽃봉오리는 하루아침에 피어나지 않는다. 마음과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지며 만유 속에 깃든 깊은 진실에 눈이 열려야, 즉 삶이 존재의 단계에 들어가야 비로소 탐스럽게 피어난다. 물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피어나는 건 아니다.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온 사람, 소유나 성취만을 향해 내달려온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많고, 사회적인 성공을 하고, 돈이 많고, 나이를 먹어도 삶의 꽃봉오리는 피어나지 않는다. 오직 배움의 주기와 노동의 주기를 성실하게 산 사람, 쉼 없이 자기를 돌아보고 삶의 빈틈에 의문을 품고 씨름한 사람, 그래서 마음과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지며 만유 속에 깃든 깊은 진실에 눈이 열린 사람, 즉 존재의 단계에 들어간 사람의 내면에서만 비밀스럽게 피어난다.    

 

  은퇴는 바로 이 대목, 우리의 삶이 노동의 단계에서 존재의 단계로 넘어가는 바로 이 대목에서 모종의 역할을 한다. 즉 배움의 단계와 노동의 단계에서 익숙하게 살아왔던 삶의 내용과 방식을 존재의 단계에 합당한 삶의 내용과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삶의 내용과 방식에 변화가 없으면 절대로 존재의 단계로 들어갈 수 없고, 진실이 이러함에도 인간은 이 변화와 변형을 끝없이 거부하고 외면하니까, 은퇴라는 파격이 끼어들어 그때까지 쌓은 성을 깨부순다. 이것이 은퇴다. 

  달리 말하면 은퇴는 노동의 단계에서 존재의 단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사람들은 노동의 세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하게 경주하다가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을 만나고 하나의 문을 만난다.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문, 발로 차버리고 싶은 문, 바로 은퇴라는 문을 만난다. 이 문은 골목에 선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이 문을 통과하라. 이 문은 너희 삶을 노동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대전환의 문이니 조금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이 문을 통과하라.      


  옳다. 우리의 삶이 노동의 단계에서 존재의 단계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은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삶의 꽃봉오리인 존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은퇴를 깊이 들여다보는 이유, 은퇴에 관해 글 쓰는 고달픔을 각오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생의 꽃봉오리는 삶이고, 삶의 꽃봉오리는 존재의 단계에 이르러야 피어나며, 우리의 삶이 존재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은퇴가 아이, 청년, 중년, 노년 가릴 것 없이 꼭 들어야 하는 삶의 깊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은퇴는 매우 중대한 인생사적 사건이다. 

결혼이나 취업보다 훨씬 넓고 깊고 의미심장한 변화를 우리 삶에 선물하는 인생사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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