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X 시대, 가장 핵심 기술은 헤리티지다.

AI시대, 우리 회사는 괜찮을까?

by 손동진

넷플릭스 '더 크라운'에는 여왕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를 테면 전쟁 참여 여부와 같은 실제 사회적, 정치적 위기를 맞았을 때,

기존 질서를 유지할지 변화할지 신중히 숙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국 왕실은 빠르지도 않을 뿐더러, 혁신적, 창의적이라는 단어엔 미지근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늘 최악은 피하고, 이상하리만치 균형을 맞춘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게 ‘시간이 쌓은 감각’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AI 시대다. 혁신이 대세고, 새로운 것이 당연히 정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영국 왕실의 의사결정과 같은 숙성된 시스템이다.

한땀 한땀 시간이 만든 건 화려하진 않을지언정 무너지지 않는다.

축적된 경험, 수천 수만 번의 실패, 이러한 말로 설명되지 않는 암묵지.

그게 오래된 조직만의 저력인 것이다.


AI가 모든 걸 대신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AI에게 뭘 대신 시킬지 아는 사람의 역할이다.

그 사람은 당연히 경험자일테고, 그 경험은 기업의 ‘헤리티지’ 안에 있다.

즉, 오래된 기업이 AI 트랜스포메이션 시대에 더 유리하다.

데이터도 많고, 맥락도 알고, 거기에 조직적 기억이 있으니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 머리 빠른 신입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시니어가 더 무서운 법이다.

그런 차원에서, AI 시대의 승자는 ‘빠른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변화는 빠르지만, 느리게 쌓여온 통찰은 느리게 오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전통의 소비재 기업 유니레버는

100년 쌓인 R&D와 소비자 행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AI를 도입하여 제품 혁신을 이뤘다.

상품기획과 패키징까지, 모든 변화는 과거에 했던 실험과 관찰이 기반이었다.

AI는 기존 지식을 죽이지 않고, 부활시키다는 증거이다.

2009년에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던 히타치는,

산업 AI와 데이터 분석 비즈니스로 전환하며 2년 만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수십 년 간 쌓여 온 센서 데이터, 유지보수 로그, 제조 실적이 AI의 원료가 되었다.

수백 가지 변수 속에서 ‘언제 기계가 망가지기 직전이었는지’,

‘어느 부품이 사실 문제 핵심이었는지’를 아는 감각,

이런게 바로 헤리티지가 힘을 발휘한 사례이다.


나는 최신 툴, 신기술, 새로운 템플릿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안 그러면 뒤처질 것 같은 강박 때문이다.

젊은 경쟁자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걸 보면서

‘우리 방식이 낡은 건 아닐까’ 매번 스스로를 고문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자동화 도입하고, 생성형 AI로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좋다. 빠르고, 편하고, 똑똑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알려주진 않는다.

AI는 답은 주지만, 맥락은 모른다

“이 기획안은 왜 고객사에게 팔렸는가?”에 대한 정답은 데이터에 없다.

그건 CD가 밤새 쪼개면서 했던 고민, AE가 울면서 붙잡았던 고객 피드백,

디자이너가 일곱 번 갈아엎은 슬라이드 안에만 있다.

그건 파일이 아니라 기억이고 근육이다.

한 때 우리도 나름,

혜성처럼 등장한 빠릿빠릿하고 참신한 애들이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렇게 빠르지 않지만, 강하다.

기계가 데이터를 학습하고, 우리는 맥락을 설계한다.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통찰. 그게 바로 우리의 헤리티지다.

이걸 가진 조직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