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와 기발자

광고인의 삐딱한 비평

by 손동진

에르메스는 아직도 장인이 말안장을 손으로 꿰맨다. 기계가 더 빠르고, 더 균일하고, 더 싸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속도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처: http://mixtemagazine.ca / http://www.1961.fr/


최근 IT 업계에서 흥미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기발자'. 기획자와 개발자를 합친 말이다. 직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생긴 신조어다. 코드를 짤 줄 아는 기획자, 혹은 제품을 설계할 줄 아는 개발자. AI가 단순 실행을 맡아주면서 한 사람이 더 넓은 영역을 커버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를 조금 다르게 읽고 싶다. 기발자(奇拔者). 기발한 사람. AI 시대에 진짜로 살아남는 인간의 조건말이다.


개발자(開發者)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다.
기발자(奇拔者)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걸 꺼내는 사람이다.


AI는 개발을 잘한다. 점점 더 잘한다. 코드를 쓰고, 카피를 뽑고, 디자인 시안을 만들고, 데이터를 분석한다. 속도는 인간이 따라갈 수 없다. 정확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AI는 질문을 만들지 못한다. 아무도 묻지 않은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다. 데이터에 없는 감각을 꺼내지 못한다. AI는 늘 인간이 던진 질문에 답한다. 그 질문 자체를 설계하는 건 여전히 인간의 일이다. 기발자는 바로 거기 있다.


출처 : KBS 9시 뉴스 (2026.3.28)


세계 최고의 브랜드 하우스들은 지금도 아날로그 냄새 가득한 시니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찾는다. LVMH도, Wieden+Kennedy도 시니어 휴먼 채용공고를 멈추지 않았다. AI가 브랜드 마케팅 캠페인을 전부 만들어주는 시대에 참 이상하지 않은가. 그들이 찾는 건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AI에게 불가능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 AI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 수십 년간 사람을 관찰하고, 실패하고, 다시 만들어온 사람만이 가진 그 감각. 그건 프롬프트로 불러낼 수 없다. 살아져야 얻어지는 것이다.


출처 : 광고회사 덱스터크레마의 채용공고


AI를 잘 쓰는 사람과 AI를 끌고 가는 사람은 다르다.


기발함은 정답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전자는 AI가 잘 답하도록 프롬프트를 다듬는다. 후자는 AI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을 던진다. 전자는 AI의 한계 안에서 최선을 뽑는다. 후자는 AI의 한계 자체를 밀어붙인다. AI를 단순히 사람 대신 써서 비용 효익을 챙기는 건 전략이 아니다. 시간 벌기다. 같은 도구를 가진 경쟁자가 내일 나타난다. 도구가 평준화되는 순간, 차이는 도구를 쥔 사람에게서 난다. 진짜 기발자는 AI에게 챌린지를 준다. AI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AI의 답보다 더 나은 질문을 가진 사람. AI가 상상하지 못한 과업을 설계하는 사람. 그 사람은 대체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AI를 대체한다.



AI 시대에 가장 위험한 사람은 AI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AI만 아는 사람이다.


개발자는 점점 AI가 된다. 기발자는 여전히 인간이어야 한다. 에르메스 장인은 오늘도 말안장을 손으로 꿰맨다. 그 손이 느린 게 아니다. 그 손이 기준이다. 기준을 가진 사람이 기계를 지휘한다. 기계는 기준을 만들지 못한다. 당신은 지금 AI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AI에게 쓰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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