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학교 교장 김철원 선생님과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 송인수 대표님의 대담
지난 3월 29일 월요일 김철원 교장선생님과 송인수 선생님의 <존엄으로서의 교육>에 대한 주제로 대담을 하였습니다. 두 분 모두 오래 교육과 교육 운동에 몸 담아 오시면서 늘 아이들의 슬픔과 고통에 응답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 오셨습니다. 아이들의 존엄성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쉽게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면서 시대적 어려움을 통과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힘들이 무엇인지 여쭈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두 분의 대담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두 분의 말씀을 옮기면서 일부의 내용을 줄이거나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자기를 찾는 교육의 실패, 내재화 된 또다른 이름의 폭력
송인수: 아이들 고통에서 가장 심각한 부분은 '자기 인생을 찾는데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통해서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자기답게 인생을 의미를 찾고, 자기다운 방식으로 직업을 찾고,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세상에 기여 해야하는데 우리 한국의 교육은 “네가 누구냐?”를 묻지 않습니다.
사실은 아이들의 고통은 일종의 <보여주기식의 교육의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심리적으로 아이들이 직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보여줄 것이 있는 아이들은 우쭐거리고 없는 아이들은 위축되는 경우가 있으며, 평범한 아이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결국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줘야 할 것은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도록 하고, 그것에 맞게 인생의 경로를 선택하고, 그것에 지식도 쌓아가는 것 결국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주체성이 없는 친구들,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친구는 남과 협력을 하기 어렵습니다. 협력이라는 것은 내가 독립적인 개체로 주관이 있는, 내가 나다움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내가 저 사람에게 맞추려고만 하면 타인은 나하고 대화를 하는데 그 사람은 없고 그 타인 속에 있는 나와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대화와 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사춘기 정도 될 때 내가 누군지에 대해 눈을 뜨고, 무엇인가에 시도하는 것이 중학교 시절입니다. 사춘기라는 것은 어른 아닌 놈이 어른 대접을 받고자 하는 퇴행적 행동을 하는 시기이잖아요. 주체로 인정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과 판단에 대해 동등하게 인정받고 싶은데 부모나 교사가 너는 아직도 주체로 인정받기 곤란해라는 피드백으로 그 시도를 누르지요. 옛날에는 그렇게 안 눌렸는데, 입시 경쟁이 심화 되면서 이 욕구를 누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입시에 눌려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데 실패하고 남의 시선에 나를 맞추느라 어려움을 겪는 것이지요.
자기를 찾는 일에 실패한 아이들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남보다 나아야지 잠깐 행복을 누리는 조건적 행복 정도인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김철원: 선생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아이들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10대라는 시기가 매우 짧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그 시절 누구를 만나고 이야기했는지가 이후 삶에 아주 많은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10대 시절 약 6년의 경험이 매우 강렬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중고등학교 시절에 무슨 경험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더 많이 생각됩니다.
송인수: 언젠가 공부하는 인간이라는 다큐를 봤던 적이 있었어요. 하버드생들이 한국 교육의 실태를 취재했던 다큐였는데, 대치동 학원에 다니는 초5 학생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냐고 했더니 ’결혼을 잘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다고 대답하는 것을보며, 그것이 저는 누구의 시선일까가 궁금했어요. 이 아이에게는 결혼을 잘한다는 것에 대한 지표가 있는 것인데, 만약 그런 시선이 부모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면 이 상황이 매우 폭력적이잖아요?
폭력은 나쁜 사람을 통해 들어오면 저항을 하지만, 이 폭력이 자기를 매우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내면화되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것이 매우 정교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걸 어떻게 구별할까가 부모와 교사의 몫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경험하는가가 매우 중요할 것 같고요, 그 시기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는 것, 이 관계 속에서 비폭력적인 가치를 아이들에게 넘겨주는 만남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한데, 사랑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이것이 통합된 사람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위한 시작, 교사의 '자각과 성찰'
김철원: 아이들에게 비폭력적인 가치를 넘겨주는 일에 있어서는 어떤 위계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관계에서 이런 것들이 전해져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의미에서 교사가 갖추어야 할 전문가로서의 역량, 태도, 윤리같은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송인수: 말씀하신 것처럼 교사의 몫이 크고, 눈을 떠야 하는데 교사들 역시 자신이 지금 아이들과 같은 피해자의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아이들에게 줄 것이 있느냐에 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의 가치를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필터링하면서 아이들에게 줄 것과 주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하려면 자기 스스로가 피해자로 살아왔던 경험에서 버려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대부분의 교사 문화가 특히 개인주의화 되면서 교사들이 자신을 성찰하도록 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닙니다. 어디서 나는 성찰의 계기를 만들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하는데, 젊은 교사들이 이 기회를 잡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삶의 다른 질문을 하지 못하고 교사가 된 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됨의 자각, 자각 이후 내가 줄 것이 있는가를 정돈하는 일과, 교사의 과제를 교육의 과제로 일깨워지는 공동체가 갈수록 적어지는 것 같아요.
김철원: 선생님을 만나 뵈면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어요. 학교의 여러 문제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다루는 영역에서 교사 개인이 자기 성찰, 자기 객관화라는 것을 통해 마음의 능력을 키우는 기회의 장을 학교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을 교사 개인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어떻게 이런 분위기를 만들까에 대한 고민이 듭니다.
송인수: 중요한 말씀이십니다. 의식과 태도의 변화가 제도의 변화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제도를 바꾸려고 하면, 그 제도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최초로 나타나야 하죠. 이 제도에 눈에 뜨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려면, 다른 시선을 필요로 합니다. 제도의 변화가 있더라도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서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많이 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의식의 변화가 제도 없이 현실에 들어와 현실을 바꾸면 바뀌지 않는 의식이 제도에 저항하게 됩니다. 의식의 변화가 따라가면서 제도를 견인하는 것이 필요하죠.
교육의 변화를 위해서는 선생님들이 스스로 먼저 깨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아이는 좀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싶다’라는 마음과 같이 교사들은 개인적인 삶의 영역 곳곳에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내면의 이중잣대가 있다는 것에 눈을 뜨며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참 이중적인 인생을 살고 있구나, 참 이러면 안되는구나라는 것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도록 자극하고 도전할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와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장선생님께서 교사의 내면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신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김철원: 말씀하신 거울과 같은 존재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합니다. 주장과 의견이 아닌 진실한 대화, 내가 생각하는 것 이면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바라봅니다. 이면의 진실 같은 것들이 학교 안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서로 확인되는 일들이 참 어려운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투정부리듯이 말해보았습니다(웃음)
송인수: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선생이 아닌 부모 정체성으로 자녀교육을 하는 것도 참 어렵습니다. 좋은 교사 운동에서 제안이 왔을 때는 어려움이 없었는데, 사교육 운동을 할 때에는 매우 공포스럽더라고요. 내가 먼저 좋은 부모여야지 내가 부모님들을 끌고 갈 수 있지라는 생각에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자기 허물에 대해 고백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것, 허물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저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마음을 여시는 부모님들이 많았습니다. 고백적 대화를 통해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고백적이고 공감적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존엄 교육의 시작은 아이들의 고유함과 독특성을 발견하는 것
김철원: 저는 스스로 아이들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다음 단계로 가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보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이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이런 것들이 보일 때가 있어요. 그 아이만 가지고 있는 고유함, 특별함이요.
이건 재능과 능력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아이가 학교에 왔을 때 학교 안에 그런 자리, 나를 드러내고 나의 고유함, 특별함이 드러날 수 있는 자리나 통로가 교육활동, 관계 속에 있어야 하고, 이것을 알아차리고 질문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렇듯 학교 안에 그런 자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환대, 학교자치라 민주주의를 많이 말합니다. 아이들이 인간 대접 받는 분위기가 있어야 하고 그런 것이 교사의 전문성과 태도에도 있지만 사실은 아주 사소한 것에 있다고 믿고 싶어요. 굉장히 높은 전문성과 비장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소함이 아이를 흔들어놓고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거나, 또 자기 인생의 목적과 이유를 알게 하지 않나 싶어요. 앞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들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 존엄으로서의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송인수: 말씀하신 것 같이 개인의 독특성을 발견하고 의미부여를 해주는 교육이,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 같이 보여주기식의 교육이 아니라 자기를 찾는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자기의 독특성이 어떤 행동과 기능으로 나타날 때, 그 행동과 기능을 포착해주는 시선이라는 것이 있고, 그걸 통해 그 존재가 존중되는 방식의 교육이요.
결국은 아이들의 독특성을 발견하는 것, 그 독특성을 살려주는 기술로서의 전문성이 필요한데 그 전문성은 결국 교사 자신이 내가 어떻게 만남을 가질 것인가?
아이들의 깊은 내면은 어떻게 찾아내고, 발견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찾아내지 못하면 아이들 속에서 자기됨을 찾고자 하는 아우성도 듣지 못할 것이고 교사 역시 자기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들을 다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교 교사일 때 아이들의 내면을 찾고자 몇 달에 걸쳐 모둠일기를 쓰는 작업 했는데, 그 만남을 통해 12월쯤 되니까 내면이 보이더라고요. 근데 이걸 가지고 이제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하니까 학년을 마쳐야 할 때인 거예요. 교사가 아이들의 삶에 개입해서 뭔가를 시도하기에 시간이 너무 짧은 거예요. 이후 제가 선택했던 만남은 연초 가정방문이었습니다. 그 한번의 가정방문을 해보니 12월까지 했던 모둠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아이의 부분을 십분만에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걸 좀 일찍알았다면 4.5월부터 아이들과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듯 아이들과의 만남의 포인트를 발견할 때 교사는 아이들을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기억하고, 아이들의 다양한 결핍을 보면서 교사로서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많은 교사들이 이런 부분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기 때문에 방앗간의 기계처럼 녹이 슬어있다고 봅니다. 아이들 속에서 이유를 찾지 못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교사가 어떻게 전문성으로 아이들을 잘 키워낼까 이전에 아이들 밑바닥에 숨겨진 것을 어떻게 발견할까가 중요한데요, 사실은 교사들이 이걸 발견만 하면 그냥 지나칠 교사는 없다고 봅니다.
삶을 받아내는 그릇을 준비하는 배움
김철원: 아이들이 공부나 배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이게 굉장히 강력하게 있는 것 같아요. 이것이 아주 강력하게 내면화할 정도로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강력하고 집요하고 집착적으로 특정 공부라고 하는 것을 아주 어렸을때부터 심어줬는지알 수 있지요. 언어적으로 사회적 분위기로 아이들이 학교화 된 공부라고 하는것 시험이라는 것을 공부의 전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기가 못 따라갔을 때의 실패나 좌절감이 정말 크고, 내가 정말 하찮고 소용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지요. 제가 아이들 만나면서 최근에 더 많이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특정 공부에 대한 메시지가 부모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기 때문에 폭력으로 느끼지 않는 부분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부모님께 미안해해요. 자기가 공부가 잘 안되고, 여기서 성적이 잘 안 오르는 것이 우리 부모님한테 너무 미안하다. 나에게 공부도 시켜주고 하는데 내가 이것에 보답을 못하는 것이 미안하다 이런 정서가 아이들 마음 속에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예전을 돌이켜보면 약간 저항도 하고 거부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가 가깝고 아주 직속되어있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공부와 배움에 대해 굉장히 고정화된 관념을 가지고 있고 다른 배움의 경험, 공부에 대한 경험, 새로운 배움의 경험을 많이 못해본 것이 느껴집니다.
이걸 우리는 사회에서 이야기할때 이제 '지식 위주냐 지식 위주가 아니냐라'는 이 프레임이 굉징히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게 중요한 것 같은데 '왜 지식을 안 다루려고 하냐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늪에 빠지고, 오히려 아이들이 느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나 배움이라고 했을 때 그게 가지는 큰 의미들, 그 위대함 같은 것을 어떻게 학교가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다른 공부의 경험, 다른 새로운 배움의 경험을 통해 ‘아, 이것도 배움의 경험이고 공부의 경험이다’라는 것을 어떻게 줄것인가 그런 부분들이 많이 고민이 되고요, 아이들이 그런 느낌을 마음으로부터 가질 수 있을 때 가장 잘 배웠다고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창작 수업을 하고 있는데요, 저는 ‘시는 시 자체로 크게 의미가 없다. 나는 너희들이 나중에 꼭 시를 써야 하고 시를 읽지 않아도 된다. 네가 시보다 훨씬 크다. 그 시를 통해서 그 시를 가지고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가 나에게 더 중요하지 시를 알고, 쓰고, 시집을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그 자체로서 아이들이 마주하는 배움, 공부는 저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삶을 받아내는 그릇으로서 그 배움을 어떻게 자기가 가져갈 것인가의 문제이고 그것을 어떻게 줄 것인가가 문제이지요. 제가 아이들을 만났을 때 경험한 것, 배운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배운 것을 통해서 그걸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할 때 아이들이 정말 잘 배운다고 저는 느낍니다. 오티에 서 아이들하고 <최고의 배움의 순간>에 대한 글쓰기를 할 때 공통적으로 아이들은 앞서 말한 그런 순간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송인수: 교장선생님 말씀 듣다가 아이들이 학교화 된 지식을 배움의 전형으로 생각하면서 그 고정관념 속에서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결국 자기 존엄을 파괴하는 것이 도리일텐데, 그러면서 부모님한테 미안한 감정도 갖게된다고 하셨어요.
이번에 제가 이사를 하면서 25년된 각종 파일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 때 수업 지도안으로 가지고 있었던 신문 전면 광고 있었어요. 얼굴이 쪼글쪼글해진 할머니 사진 아래 '어머니 나에게 음식을 주실 때 왜 안드세요... '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어머님이 고생하면서 자식에게 모든 걸 쏟아부은 내용을 삼성전자가 공익광로로 했어요. 이걸 우리반 아이들에게 공유하면서 같이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나서 우리 둘째 아들한테 보여줬더니, 우리 아이가 '나는 우리 엄마가 저렇게 안됐으면 좋겠다' 며 엄마는 엄마대로 행복한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자유로웠어요.
각자의 삶을 잘 사는 자세로 부모가 아이들에게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 부모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주기 위해 나 아닌 것을 끄집어내면서 부응하다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아야 타인에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타인에게 갈 수 없듯이, 나를 아는 과정에서 나를 만나고 그 안에서 채워진 온전한 나를 가지고 타인을 찾아가면서 교육이 완성되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알아가는 여정을 잘 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성공적이지 않을까 싶어요.
존엄한 사람, 내면의 연결자로서의 교사
송인수: 되게 부담스러운 질문인데 대답을 해 보겠습니다. 우선 교사는 아이들에게 자기를 찾는 삶의 여정을 가지라고 격려해야하고, 또 그대로 살지 못할 때 개입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또한 세상의 폭력적인 가치가 아이들의 영혼을 유린하거나 어떤 교과지식의 형태로 또는 부모의 사랑으로 잘못된 가치가 그 아이들 속으로 들어갈 때 경찰처럼 그렇게 하지 않도록 바리케이트를 쳐주고 더 나아가 제도와도 한편으로 싸울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넣어주는 일이 온전한 의미로서의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그런 일들을 하려고 하면 교사 자신의 인생도 존엄한 삶으로 경험하는 여정을 가져야 되잖아요? 자기가 누구에게든지 존엄한 자로서 존엄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격려할 수 있는 것, 선생으로서 스스로 나 됨을 끝까지 지켜 가면서 아이들에게도 깨우침을 주며 함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거든요.
그리고 많은 부분 상실한 상태로 선생이 돼요. 우리 사회에서 그 고통을 겪을 수 있는 건강한 자극은 또 안 줍니다.
기본적으로 지금 선생님들은 (제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교사로서 맞지 않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교사가 되지 말아야 할 분들이 교사가 너무 많이 되었어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저 자신부터.. 기본적으로 교사는 범생들이거든요. 범생들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다 잘 알아 들어요. 그렇게 살아왔어요. 내 주변의 친구들은 더 잘 알아들었고, 그 속에서 각축을 벌이며 공부를 해서 선생이 되었어요. 좋은 일자리니까요. 그렇게 선생이 되어 왔는데, 선생으로서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자신과는 다르거든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이야기 하면 못 알아듣는 아이들이 많아요. 기본적으로 우리 교육과정이 친절하지 않고 또 그 아이의 자기와 연결되는 지점으로 지식이 뿌려지는 게 아니고 그냥 던져지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교사는 전달해야하는 지식을 그 아이가 자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그 지식을 잘 정리해서 그 아이의 내면과 잘 연결해 주어야 하는데, 자기가 배운 것과 자기가 습득한 학문적 지식체계를 잘 전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자기가 배웠던 지식을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외국어로 번역해 주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식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잘 번역해 주려고 하면 그 아이가 어떤지 존재인지를 알아야 되는 것이고, 그 아이에 맞는 언어체계를 찾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번역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그 세계 속에 있어 봐야 해요. 그런데 그 경험이 없기 때문이고 되게 생소하고 못 따라가는 아이들이 너무 불편하고 그 아이들이 도대체 왜 못따라 가는지 잘 모르겠고 그 속에서 교사가 자기 효능감의 위기를 경험하는 거잖아요.그 과제를 번역을 잘 해서 이 화두를 선생님들이 붙들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 하나를 붙들고 치우친 뜨거움을 갖는 것.
송인수: 제가 인생을 살아갈 때 무엇인가 변화시켜야 할 상황이 있을 때 그 과제 앞에서 제가 힘을 내야 되고 뜨거움을 가지고 밀고 가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은 나이스한 존재로 자신이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관계에서 만이 아니라 실제로 가치에 있어서도 두 가지를 같이 내려놓지 않고 이왕이면 같이 끌어안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요.
예를 들어서 ‘세상에 쓰임 받는 존재로 내가 살고 싶다.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서고 싶다.’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또 어떤 마음이 들기도 하냐면 ‘나는 좀 편안한 자리에 있고 싶고 안전한 둥지에 있고 싶다’ 그것을 통합을 하게 되면 ‘나는 안전한 둥지에 있으면서 내게 있는 일부를 남에게 주어서 어려운 사람들의 복지에 기여하고 싶다’ 이런 거예요.
이게 통합되어서 나타난 개념이 강남좌파잖아요. 자기 삶의 자리는 강남에 있기를 원하고 지향은 고통받는 사람들 쪽으로 향하는 좌파성에 관심을 갖는 이 두가지의 삶을 살고 싶어하거든요. 부모도 아이를 그렇게 키우고 싶어해요. 아마 이우학교에 자녀를 보냈던 많은 부모님들이 우리 아이를 강남좌파로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어요.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강남성과 좌파성이 공존하기 어렵거든요. 이 공존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없어요. 결국은 어느 하나를 내려 놓아야 해요. 강남성을 내려 놓을 것이냐, 좌파성을 내려 놓을 것이냐. 왜냐하면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그 두 가지가 통합된 방식에서는 힘이 안 나오고 무엇을 붙들 수가 없어요.
늘 어정쩡 하고 서성거리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확 뭔가 나와요. 그럴 때는 하나를 버리더라고요. 강남을 버리든지, 좌파를 버리든지 그 나를 버릴 때만이 비로소 도망가든지 뛰어들든지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다소 신사로 키우는 경향, 두 가지 좋은 가치를 붙들려고 하는 존재로 키우려는 경향이 있지요. 지난 인생을 돌아 볼 때 제가 힘이 안 나올 때는 언제나 치우침 없이 다 같이 붙들고 가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선생으로 있었을 때, 학생부의 어느 선생님이 잠시 바깥에 외출을 하고 돌아왔어요. 자기 자녀의 고등학교 배정 그 결과 때문에 간 거예요. 공립학교 선생님이었거든요. 그런데 싱글벙글 해 가지고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왜그래요?’라고 했더니 자기 아이가 건국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했대요. 너무 기쁘대요. 그 주변의 공립학교에 가지 않고, 건국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너무 기쁘대요. 근데 그 선생님은 공립학교 선생이잖아요. 공립학교 선생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면 안 되죠. 자기는 공립학교 선생으로 사는 것이 편하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편하게 사는 공립학교 선생이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잖아요. 그래서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내서 그냥 입시 기계가 되는 것을 부모로서 좋아하잖아요. 이 두 가지가 자기 속에서 모순이 없는 겁니다. 모순을 못 느끼는 거예요. 그것을 모순으로 느끼고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지 자기 속에서 평화가 찾아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평화 속에서, 그 치우침 속에서 에너지가 생기는 거예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힘 주어서 말하고 힘이 되게 하려고 하면 수많은 모순된 가치 속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없고요, 하나를 붙들고 치우치게 살아가야 해요. 이 균형 잡힌 삶은 힘이 안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원만하게 무엇인가를 해 주려고 하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모든지 잘 조화롭게 유지하려고 하는 그 삶 속에서는 힘이 나오지 않아요.
힘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뜨거움이 없다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그 뜨거움을 기반으로 해서 자기 생명을 끌고 가는 거거든요. 그 뜨거움은 치우침에서 나오는 거예요. 어느 한 가치를 선택하면 나머지 가치를 버리는 것이고 그럴 때 비로소 치우친 자에게만 찾아오는 어떤 그 뜨거움 속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면서 가는 것이고, 길을 가면서 사람들에게 그것이 학생든 부모님들이든 주변 동료들에게든 무엇인가를 말이 아니더라도 메시지를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되겠지요. 그 삶에 맞춰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기쁘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 삶을 ‘나만 손해봐, 나만 억울하게 혼자 고생해’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좋은 삶의 가치를 내가 누리고 사는데 내가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한들 내가 이 삶을 다른 무엇과 왜 바꾸는데’ 라고 생각 하면서 자신의 삶의 풍요로움을 즐기며 사는 거예요. 그런 풍요를 누리며 사는 선생님 밑에서 아이들이 배운다면 그 아이들이 받는 도전이라는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이고 그 아이를 통해 받는 부모의 도전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동료 선생님들이 받는 도전이라는 것이 있는 거잖아요.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슬픔이 훨훨 나아가도록
김철원: 제가 아이들한테 하는 말이 누구도 네 앞에서 너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할 때 그것을 듣고 있지 말라고 이야기 많이 하거든요. 네가 너의 이야기를 ‘내가 이런 사람이다.’ 선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럼에도 또 아이들에게 해 주시고 싶은 말을 해본다면 뭔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나 무기들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든 존엄을 지키는 일이든. 그런 자기만의 방법들을 계속 훈련하고 경험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강력한 무기로 가져가서 누가 나에게 ‘넌 이런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는 제가 그 부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서 일지 모르겠어요. 송인수 선생님도 고통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고통이나 죽은 같은 것. 그런 것들을 다루어 가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이나 즐거움 기쁨 같은 것들로 충만해 있을 때의 경험과 감정들도 너무 중요하지만 고통이나 상처들 어려움들 그림자 같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언제든 우리 삶의 여정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고 어떻게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고요. 해주고 싶은 말이라기 보다는 제 꿈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과 그런 작업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것을 늘 생각하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시창작 시간에 어떤 친구가 쭉 목록을 말했어요. ‘눈물이 계속 나려고 했는데 울지 않던 목록’을요. 어머니가 몇 년전 돌아가신 아이인데, 거기에 엄마의 죽음도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뭔가 나아가지 못한 슬픔이 내 속에 너무 많이 쌓여있다. 내 안에’ 라고 했습니다. 그 글을 듣고 집에 돌아와 한참 동안 그 문장을 생각하고 어떻게 밖으로 이 슬픔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혹은 그 슬픔을 가지고 이 아이가 조금 더 진전된 어떤 것들을 해나갈 수 있도록 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도와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한참 했던 것 같아요.
송인수: 슬픔이 너무 쌓여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아이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도 귀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 학생이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슬픔이 자기를 막고 있다고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어서요. 그 아이는 나가고 말 거예요. 결국은 나가고 말 것인데, 슬픔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나가는 시점과 방향이 정해질 거라 생각해요.
저는 그 아이가 결국 세상에 나가서 하는 일들은 자기가 직면했고 풀어보려 했던 슬픔을 다루는 방식으로 비슷한 방식의 슬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 또 가서 그 문제를 공적으로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슬픈 문제를 푸는 것은 중요하지요. 그래야 힘이 나니까요. 그러나 슬픔과 결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주제와 결별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그 주제를 풀어내고 그 주제를 끌어안고 자기 생을 사는 것이 그 아이의 진로가 될 것이고 미래가 될 것이고 타인에게 다가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과거와 미래가 그렇게 만나는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의 진로가 펼쳐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철원: 토요일 고1 학부모 총회가 있었고 학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 해 달라고 하셔서 제가 특히 부탁드렸던 것은 아이들에게 정서적이 인간적인 지지자가 되어 달라는 말씀이었어요. 두 번째는 이우학교의 학부모님들이시지요. 이우학교의 공동 주인이고, 이 학교의 운영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주체로서 함께 해 주셔야 하는 부분을 말씀드렸습니다. 세 번째는 어른이나 시민으로서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각자의 조건과 한계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고 하나를 정해서 그것을 통해서 뭔가 바꾸고 변화해 나가는 것들을 올해 안에 찾아 보고 학부모회에서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발굴했으면 좋겠다는 이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세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엄마 아빠가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의 자기 쇄신 같은 것, 자기 갱신 같은 것을 깊이 생각해 보고 그런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장들 통로들이 있어서 내가 한 인간으로 조금더 진전되어 가고 나아가고 성장할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고 그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가 어떤 과제들에 직면에 있고 어떻게 마주해 나갈 것인가 이런 것들을 꼭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편입니다.
송인수: 우리 부모님들께서 결국 이런 깨달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대로 자식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성격이 강한 아이든 그렇지 않은 아이든 내 뜻대로 자식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내 뜻대로 내가 밀면 아이가 좀 밀리는 경험을 하는 부모님들의 경우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아이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왔고, 하자는 대로 잘 따라오면서 자기도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라고 이야기 할지 모르는데 생의 언젠가는 내가 밀면 밀리지 않는 아이였구나 하는 경험을 하게 될거예요.
우리 첫째는 중학교 1학년 때 경험했고요. 내가 미는 대로 가는 아이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요. 그래서 그 때 많은 것을 내려 놨지요. 밀어도 밀리지 않는 아이라는 것을 부모들이 알 때 결국은 부모들이 많은 것을 내려놓거든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하면서 그 한 두가지에 자기를 걸어야 하거든요. 자식교육에 있어서. 그리고 그 승부를 걸 때 아이가 수용을 해야 하거든요. 걸 때 허용을 안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것은 관계가 망가졌기 때문에 용납하지 않는 것이지요.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 뭔가를 걸 때 그것은 가치로워야 하고 그런데 너무 많아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나는 무엇으로 잡고 있는가 그리고 나머지 것은 내가 내려놓을 자세가 되는 것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밀면 밀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찾아오기도 하지요. 저희 둘째는 고등학교 2학년 10월에 사춘기 베틀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무난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있더라고요. 자기가 있으니까 부모의 어떤 좋은 이야기 일지라도 지시적인 이야기와 자기 인격에 스크래치가 생기는 개입에 저항을 하는 것을 보았어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있더라고요.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것이 있어야 남의 것을 받아내거든요. 내 것의 깔때기에 남의 것을 받아내고 버리고 하는 것이지요.
저희 단체 자녀교육하시는 분에게 한번은 이렇게 물었어요. ‘그렇게 밀면 밀리는 듯한 아이들이 있던데요?’라고 하니까 ‘결국 결혼할 때 안 밀리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부모의 선택 부모의 요구 안 받아들인다. 받아들이는 순간 불행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자기 선택을 하게 되고 그때 자식의 배신을 경험하게 된다. 자식은 그 때서야 밀리지 않고 버티는 경험을 할 때는 많이 늦게 된다. 거기서 아이가 밀려 버리면 성인이 되었을 때 굉장히 큰 문제가 되어서 또 자식에게 대물림 되기도 한다.’ 라고 하셨어요. 아이에게 여유의 공간을 주기 위해서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과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잘 정리를 하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중학교 때가 그럴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때는 사랑을 퍼 주고 기본적인 생활습관을 잘 기르도록 도와주는 게 필요하지요. 그러나 중학교 때는 아이가 안 밀리는구나 하고 느낄 때 빨리 태도의 전환을 취했으면 합니다.
희망을 가르치는 것, 근거 있는 희망에 대해 상상하는 것
김철원: 제가 졸업식 축사때도 그런 말을 썼는데요. 제가 아이들한테 교사로서 있으면서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데 있어서 저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목표는 결국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르치는 것. 저의 지난 경험을 통해서 보았을 때 결국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그'희망'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망이라는 것이 거짓된 희망, 희망 고문하는 듯이 그런 헛된 희망은 아닌 것 같고. 저에게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체가 있는그런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주로 잘하는 말이 있지요. ‘망했다’는 말이 있지요. 저 ‘망했다’고 말할 때의 그 말이 단순히 아이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이 아이들 내면에 어떤 자국을 남긴다고 생각해요. 흔적을 반드시 남기고 자국을 반드시 남긴다. 자기가 망했다고 했던 그 경험을 달리 돌아볼 사람이든 다른 경험이든 질문을 못 만나면 ‘망했다’는 채로 아이들 내면에 그냥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희망에 대해서 아이들과 이야기 하려고 하는 편인 것 같아요. 그런데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마 송인수선생님이 그동안 해 오셨던 작업들이 결국은 무언가 있어서 그 있는 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 하는 상상력이죠. 이런 것이 이렇게 펼쳐져야 한다는 상상력들 그런 그림들을 그리시고 작업을 해 오셨을 것 같기도 해요. 희망이라는 것이 지금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결국에는 그 너머를 보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 황현산 선생님이 칼럼에 쓰신 것 중에 노비들이 노예가 없고 만인이 모두 평등한 세상을 그리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거기에 어떤 희망과 상상이 있는 것 아니겠냐고 하셨는데요. 그 시대에 노예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잖아요.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 되었잖아요. 그런 면에서 아이들과 그렇게 상상을 이어가 보고싶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그것의 의미를 아이들에게 계속 읽어 주는 것. 그것이 완전히 망했거나 완전히 절망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이것이 어느 부분에서 의미가 있고 꽃이 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부여를 서로 해 주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구조가 아무리 굳어져 있어도 그 안에서 평범함 사람들이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하고 선택들을 하고 그것이 완전히 구조를 깨뜨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작은 구멍이나 스크래치라도 내면서 가는 것이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당장 내 앞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 앞으로의 미래, 아이들의 미래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며 희망이라고 하는 것을 계속 끌어안고 계속 아이들과 그 이야기를 해내고 싶어요.
송인수: 희망은 상상력과 연결된다고 하셨는데 굉장히 동의가 됩니다. 지금은 상상이 다 단절된 시대를 살고, 상상하지 않도록 권장하는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것만 다라고 생각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것 같아요. 상상한다는 것은 어디선가 이루어진다는 가능성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상의 끈을 놓지 않는 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어쩌면 우리 교육에서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 지식교육일지라도 그 속에 상상할 수 있는 힘이 들어가는 교육으로 이것을 통합해 내는 과정들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상상이라는 것이 지식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해석하는 어떤 시선이거든요. 상상력을 가지고 지식을 보면, 지식과 지식이 단절되 있는 것을 이어내는 힘일 수도 있는 것이고, 해석해 내는 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희망이 살아있는 힘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거나 타자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희망의 근거가 있어야 되거든요. 근거가 없이 제시되는 희망은 단순한 위로고 그 위로도 상대는 위로로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어떻게 근거와 데이터로 희망이 입증될 수 있느냐가 중요할 것 같아요. 특히 저는 시민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시민들에게 ‘이거 반드시 우리 해냅시다. 이게 된다니까요’ 그렇게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왜냐면 하면서 설명하는 설명체계가 있어요. 그런데 보통은 우리가 큰 이야기를 할 때 거기서 희망을 이야기 하면 되게 황당해 하거든요. 특히 상상을 가지고 이야기 하면 ‘그게 되겠어?’ 하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된다는 일종의 전략이 있지요.
큰 바위를 쪼갠다고 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냉소하고 비웃지요. 그 희망에 대해서.. 그런데 그 집채만한 바위를 잘게 나누어가지고 잘게 만들어진 이 자갈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결할 수 있는 전략과 실력을 보이게 되고 그렇게 해서 1단계에서 자갈들을 깨뜨리고 2단계에서 그 실력을 가지고 돌멩이를 깨뜨리고 그 실력을 쌓아서 큰 바윗덩어리와 맞서는 과정들을 밟아갈 때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 희망에 대해서 냉소하다가 그 희망과 연결되는 작은 과제들이 자꾸자꾸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이 근거있는 희망이구나.’ 이렇게 느껴지면서 사람들이 마음을 주는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하기에 앞장선 분들이 교사일수도 있고 시민운동 하는 분들일 수도 있지요. 그 분들이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시민들에게도 그렇고 희망의 근거를 정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진다는 근거가 내 속에서 질문되고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이런 과정이 매우 중요하겠고요. 이렇게 근거 있는 희망으로 제시가 될 때 그것을 이야기 하는 사람 자신이 밝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희망을 이야기 하면 밝을 수 있지요. 근거 있는 희망을 가지고 일을 하거나 아이들 앞에 설 때에는 그 선생님이나 교육자나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굉장히 밝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려진 울음을 포착하는 사람이 되는 꿈
송인수: 아이들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 나이에 따라서 일하는 방식은 좀 달라지겠지만 좀 변신을 해 가면서도 그 과제를 끝까지 붙들겠다고 하는 것인데, 제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의 고통을 정서적으로 경험하는 기회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학교 선생 시절에는 우리 아이들의 고통에 대해서 상상할 필요가 없었어요.
내 주변에서 아이들이 늘 고통을 받고 있고 조금만 집에 가보고 조금만 대화해 보면 울음이 터지는 아이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저 고통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만 생각했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시민운동에 나와보니까 아이들이 없어요. 그래서 그 고통은 늘 상상을 해가면서 지켜야 되는 것이기도 해서 제 기도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제가 잊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늘 제 안에 늘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쓴 아브라함 헤셀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예언자란 무엇이냐. 예언자는 소리없는 울음을 듣는 사람이다.’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예언자는 소리없는 울음을 듣는 사람. 우리 사회에서 소리 없이 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안들리기 때문에 시선을 거기 안 주기 때문에 그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잖아요. 예언자들은 가려진 울음을 포착해 내는 사람이잖아요. 우리 교사들이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또 교육운동하는 사람들이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우는 아이들의 소리없는 울음을 못듣게 되면 결국 운동을 할 때 결국은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거든요. 자기의 성장과 자기에 대한 인정과 이런 것들이 자꾸 관심사가 되어서 나중에 소홀해지기 굉장히 쉽고 저도 그러기 굉장히 쉬운 거지요. 그것을 끝까지 지키면서 은퇴이후에도 이 과제를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김철원: 앞으로 무슨 일이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면 좋겠습니다. 아이들과 있으면 제일 좋고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곳에 가더라도 아이들을 만나는 작업을 계속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저를 볼 때 아이들을 굉장히 좋아하고 아이들을 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비춰지는데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제 안에 아이들을 안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제 안에 특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사랑이 충만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아이들 옆에 있으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원래 눈물이 많아서 우는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잘 울어서 많이 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곁에 있으면 울 수밖에 없다. 지금.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아이들이 그런 것 같아요. 다 알 수 없지만 그런 일들을 앞으로 계속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특별히 동료들, 좋은 동료들과 연대하는 꿈들, 그런 것들을 생각해요. 제가 굉장히 작고, 작은 단위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스타일인데 최근에 점점 많이 하는 생각은 이런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연대하면서 함께 가야되겠다. 서로서로가 그런 것들을 연결하면서.. 그래서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 않고 그렇게 갈 수 있는 그런 연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꿈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