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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 굿바이, 마왕

아직도 꿈꾸는 민물장어

by 꿈동아빠 구재학


1988, '그대에게'


1988년 12월 24일, 잠실 체조경기장.

MBC 대학가요제 결선이 한창이었다.


당시 대학가요제는 젊은 대학생들이 창의적인 음악과 끼를 발산하는 청춘문화의 상징이자, 신선한 음악적 시도로 한국 가요계에 다양성을 불어넣던 등용문이었다. 그리고, 매년 12월에 개최되어 온 국민이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켜보던 특별한 무대였다.


그러나 그해 결선은 유난히 밋밋했다. 비슷한 발라드가 이어지며 객석의 열기도 식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지막 순서로 참가번호 16번 ‘무한궤도’가 무대에 올랐다.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학생들이 모인 밴드였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고 조명이 꺼지자, 화려한 신디사이저 전주가 경기장을 압도했다.

"빠라바 빠라밤 빰빠 빠라바 밤빠바~"


그 첫 소절이 울려 퍼지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조용필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앞선 곡들로 지루하던 중,
이 곡의 전주를 듣는 순간 ‘이 곡이 바로 대상감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무한궤도는 〈그대에게〉로 대상을 수상했다.

멤버들이 명문대생이라는 점도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음악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다음 날 신문과 방송은 ‘무한궤도’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도 친구들과 “대학생들이 만든 노래가 이렇게 세련될 수 있냐”며 흥분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스물한 살의 청년 신해철은 단숨에 한 세대의 우상이 되었다.

훗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이 장면이 재현될 만큼, ‘그대에게’의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은 ‘7080’에서 ‘8090’으로 넘어가는 음악적 세대 전환의 상징이었으며, 감성적인 발라드 중심이던 시대에서 경쾌한 록과 밴드 음악의 부상을 알린 1980년대 말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곡은 단순한 영감의 산물이 아니었다. 치밀한 전략의 결과였다.

신해철은 그해 강변가요제 탈락의 아픔을 딛고 가요제의 흐름을 철저히 분석했다.

"전주를 웅장하게, 후렴구는 쉽게, 마지막을 길게."

하지만 부모님은 음악을 극구 반대했다. 음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았기 때문이다. 신해철은 동네 문방구에서 멜로디언을 사서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버지 몰래 작곡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곡이,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무대에서 내려온 스물한 살 청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지금까지 음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신 부모님께 대단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효도하고 싶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 몰래 이불속에서 작곡하던 청년의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빛나던 시절


대학가요제에 함께 참가했던 멤버들이 학업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무한궤도는 자연스럽게 짧은 활동을 마쳤지만, 신해철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1990년, 그는 무한궤도의 멤버로 활동했던 정석원이 새로 만든 그룹 015B의 1집에 객원 보컬로 참여해 〈슬픈 이별〉, 〈난 그대만을〉을 불렀고, 이듬해 2집에서는 〈이젠 안녕〉에 목소리를 더했다.


같은 해, 솔로로 전향한 그는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어진 2집 Myself에서는 〈안녕〉, 〈재즈 카페〉, 〈내 마음 깊은 곳의 너〉가 연달아 히트했다. '안녕'에서 시도한 랩은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앞선 것이었고, '재즈 카페'의 세련된 사운드는 90년대 젊은이들이 꿈꾸던 감각적인 도시 문화를 대변했다. 대학가의 카페와 술집에서는 그의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 시기 그는 날카로운 '마왕'이 아닌, 90년대 청춘들의 '연인'이었다.

수려한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 세련된 팝 사운드. 그는 당대 최고의 팝 아이돌이었다. 아마도 대중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랑하고 추억하는 신해철의 모습은 이 시절일 것이다.




록 밴드, N.EX.T


1992년, 그는 모든 것을 뒤집었다.

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그였지만, 사실 그의 뿌리는 밴드 '무한궤도'였고 밴드 음악은 그의 오랜 열망이었다. 멤버들이 학업으로 복귀하며 솔로가 되었지만, 솔로 2집의 '대박'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은 그는 더 이상 상업적 성공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 꿈은 이뤄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또한 그 꿈이 행복과 직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발라드 가수로서의 성공은 이루었지만, 그것이 그가 원하던 행복은 아니었다.

그는 발라드를 버리고,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록 밴드 'N.EX.T(넥스트)'를 결성했다. 첫 앨범의 타이틀곡 〈도시인〉은 충격이었다. 강렬한 비트, "회색빛의 웃음" 같은 사회 비판적 가사. 감미로운 발라드를 기대했던 팬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도시인〉은 히트했고, 〈인형의 기사〉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그는 모두가 환호하는 편안한 길 대신, 스스로 논란의 중심에 서는 가시밭길을 택했다.



마왕의 탄생


넥스트는 멈추지 않았다.

2집, 3집을 거치며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메탈, 국악을 접목한 실험을 이어갔다. 1997년 발표한 4집 'Lazenca, Save Us'와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록과 오페라가 결합된 장대한 서사시였다.


1997년 12월 31일 콘서트를 끝으로 넥스트는 '잠정 해체'를 선언했다.

"국내시장과 공연시스템의 열악한 구조로 인해 밴드활동의 지속이 어려워 음악적으로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 더 이상의 독야청청은 싫다. 빙하기의 공룡 신세로 음악적 지향이 같은 동료 밴드 하나 없이 내부적으로만 답을 구하려다 보니 깨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열악한 국내 음악 시장과 공연 시스템 속에서 '우리만 홀로 고고하게(獨也靑靑) 수준 높은 음악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현실을 비판하는 의도였지만, 이 발언은 '오만하다', '건방지다'는 비난과 함께 큰 파장을 불렀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은퇴’가 아니라,

‘주류 록밴드 넥스트’로서의 역할을 마쳤다는 일종의 ‘졸업 선언’에 가까웠다.

훗날 그는 “숙제를 다 끝냈으니 이제 프로듀싱이나 영화음악 등 다른 영역으로 가겠다”는 뜻이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넥스트 해체 이후 그는 프로듀서로 변신했고 2001년부터는 심야 라디오 〈고스트스테이션〉을 진행했다. 밤을 지새우며 그 방송을 들은 젊은이들은 그의 거침없는 언어와 깊은 통찰에 열광했고, 그에게 ‘마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소년기나 청년기의 부정적인 생각들, 시니컬하게 보고 기성세대를 깔보는 게 없다면 세상 자체가 멸망할 거라고 본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을 꾸짖기보다, 그들의 편에 서서 함께 기성세대와 싸워주는 어른. 그것이 바로 ‘마왕’ 신해철이었다.


신해철은 음악뿐 아니라 사회문제에도 직설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의 이런 태도는 ‘고스트스테이션’ 청취자들을 중심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동시에 기성세대와 보수적인 대중에게는 그를 ‘논란의 아이콘’으로 각인시켰다.



허망한 죽음


신해철은 2010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노래 중 뜨지 못해 아쉬운 한 곡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1999년 발표한 〈민물장어의 꿈〉을 언급했다.

“(나의) 팬이면 누구나 알지만 뜨지 않은 어려운 노래다. 이곡은 내가 죽으면 뜰 것이다. 내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질 곡이고 노래 가사는 내 묘비명이 될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이 노래는 좁은 도랑에 갇힌 민물장어가 바다를 꿈꾸는 이야기다.

담수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가야 산란할 수 있지만, 댐과 보에 막혀 끝내 바다에 닿지 못하는 장어.

그 절박한 꿈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음악과 더 자유로운 표현을 갈망했던 신해철 자신의 여정과 닮아 있었다.


2014년 가을,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6년 만의 새 앨범을 발표했고, 방송과 공연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10월 17일, 단순한 장 협착 수술을 받은 그는 의사의 동의 없는 위 축소 수술과 부실한 사후 조치로 인해 패혈증에 빠졌다. 그리고 10월 27일, 신해철은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도 욕을 많이 먹어 필시 영생할 것”이라며 농담처럼 말하던 그는, 무대가 아닌 수술대 위에서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굿바이, 마왕


장례식장에는 1만 5천여 명의 조문객이 모였다.

그가 마지막 곡으로 남기고 싶다던 〈민물장어의 꿈〉은 그해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그의 죽음은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법', 일명 '신해철법'을 만들어냈다. 육신은 떠났지만,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남겼다.


2024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인천에서 열린 트리뷰트 콘서트는 라인업이 공개되기도 전에 매진되었다.

무대에 오른 이승환은 말했다.

"신해철은 천재 예술가였다.
10년이 지나도 가요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은 〈그대에게〉를 함께 불렀다.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처음 울려 퍼졌던 그 노래가, 3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신해철은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타협하지도 않았다.

그의 솔직함과 거침없는 태도는 때로 논란을 불렀지만, 바로 그 솔직함 때문에 그는 더욱 진솔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굿바이, 마왕'.

그는 떠났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이거였나?"


민물장어는 아직도 꿈을 꾼다.

우리 곁에서, 그의 노래로.




이것으로 〈하늘의 별이 된 전설의 가수들〉 연재를 마칩니다.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연재를 준비하며 느낀 마음과 생각은 에필로그를 통해 따로 나누겠습니다.

긴 여정 동안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한궤도 - 그대에게 (1988 MBC 대학가요제)


신해철 -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신해철 - 민물장어의 꿈


<참고자료>

위키백과 - 신해철

나무위키 - 신해철

위키백과 - 그대에게

나무위키 - 신해철 의료사고 사망사건

월간중앙 - '마왕' 신해철, 뉴 밀레니엄 시대를 노래하다

한국일보 - 신해철 10주기 콘서트, 아직도 우리는 '마왕'을 추억한다

경향신문 - 신해철 10주기…여전히 '마왕'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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