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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 행복을 꿈꾸었던 팝의 제왕

행복할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

by 꿈동아빠 구재학

전설의 시작


1983년 3월 25일 밤, 미국 전역의 많은 사람들이 TV 앞에 자리했다.

흑인 음악의 산실인 모타운 레코드가 설립 25주년을 맞아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마빈 게이 등 전설적인 가수들을 한자리에 초대한 특별한 무대였지만, 그중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등장이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무대에 선 마이클 잭슨은 검은 정장 차림에, 한쪽 손에는 반짝이는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조명이 어두워지자 'Billie Jean'의 인트로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끝, 어깨, 발끝까지 모든 움직임이 음악과 하나가 되었다.


음악이 절정에 이르자,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 뒤로 움직였다.

마치 중력을 잊은 듯한 움직임이었다. 앞으로 걷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뒤로 흐르는 이 춤은, 달 위를 걷는 것 같다 하여 '문워크(Moonwalk)'라 불렸다. 객석이 일제히 환호했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리듬을 놓지 않은 채, 손끝과 시선으로 관객의 함성에 응답했다.


무대는 완전히 그의 것이었다.

이 무대 이후로 문워크는 마이클 잭슨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We Are The World


무대 위의 전설이 된 마이클 잭슨은 무대 밖에서도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5년,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은 내전과 극심한 가뭄으로 대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굶주린 아이들의 모습이 전 세계에 방영되면서 국제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마이클 잭슨은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 'We Are The World'를 공동 작곡했다. 그리고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빌리 조엘 등 미국의 최정상급 가수 45명을 한자리에 모으는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슈퍼그룹 'USA for Africa' 명의로 발표된 이 노래는 3월 7일 발매 후 단 3일 만에 80만 장이 팔리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판매 수익금은 아프리카 기아 구호를 위해 사용되었고, 최종적으로 6천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이 노래는 아프리카의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전 세계가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팝의 제왕


1982년에 발매된 'Thriller' 앨범은 마이클 잭슨을 명실상부한 '팝의 제왕(King of Pop)'의 자리에 올렸고, 그를 진정한 전설로 만들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37주 연속 1위, 전 세계에서 7천만 장 이상 판매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이 남긴 영향은 음악을 넘어섰다.


그는 뮤직비디오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 이전까지 단순히 노래에 맞춰 연주하는 모습을 담는 것에 불과했던 뮤직비디오는 그를 만나 하나의 예술 장르가 되었다. 14분짜리 'Thriller' 뮤직비디오는 단편 영화에 가까웠고, 'Billie Jean'에서는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빛났으며, 'Beat It'에서는 갱단의 대결을 춤으로 해결하는 등, 그는 영상에 완벽한 스토리를 담아냈다.


MTV는 그의 비디오를 방영하기 위해 흑인 가수에 대한 금기를 깨야 했고, 이후 뮤직비디오는 음악 산업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 완벽한 무대 뒤에는,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이 있었다.



여섯 살 소년


1958년 8월 29일, 마이클 조셉 잭슨은 인디애나주 게리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홉 남매 중 일곱 번째 아이였다.


1964년, 겨우 여섯 살이었을 때 아버지 조 잭슨은 아들들을 모아 '잭슨 파이브'를 결성했다. 연습이라기보다 학대에 가까웠다고 한다. 실수하면 가차 없는 구타가 이어졌다. 채찍, 벨트, 끊임없는 폭언.


형제들 중에서도 마이클이 가장 많이 맞았다고 한다.

"너는 못생겼어. 코가 너무 크고 뭉툭해."

아버지는 어린 마이클에게 그렇게 말했다. 마이클은 훗날 그 말이 평생 상처로 남았다고 고백했다.


밤늦게까지 연습은 계속되었고, 그에게는 학교에 갈 시간도,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었다. 확인된 공연만 500회. 지역 페스티벌, 학교 행사는 물론이고 스트립 클럽과 성인 바에까지 찾아가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럴 때마다 어린 마이클은 창밖을 내다보며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1969년, 잭슨 파이브는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I Want You Back', 'ABC', 'I'll Be There' - 연속으로 빌보드 1위를 차지하며 '흑인 비틀즈'로 불렸다. 당시 열한 살이었다.


성공은 계속되었지만, 행복은 없었다.

무대에서 환호를 받을 때만, 그는 잠시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사고


1984년 1월 27일, 펩시 광고 촬영 중이었다.

무대 불꽃이 잘못 터지면서 마이클의 머리에 불이 붙었다. 두피에 2도와 3도 화상을 입었다. 극심한 고통이었다. 재건 수술이 필요했다. 이것이 그의 첫 성형수술이었다.


화상 치료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만성 통증이 시작되었다. 두통과 두피 통증을 견디기 위해 진통제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일반 진통제였지만, 점차 강한 약이 필요해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 깊은 상처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마이클은 거울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고, 이는 어린 시절의 끔찍한 학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화상 치료를 위해 시작된 수술은, 점차 아버지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수술은 반복되었다.


언론은 그를 "성형 중독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는 사고로 시작된 치료와 어린 시절의 상처, 그리고 만성 통증이 모두 겹쳐진 결과였다.



네버랜드


성인이 된 마이클은 자신이 갖지 못한 어린 시절을 만들고자 했다.


1988년, 마이클은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 약 1,950만 달러를 들여 거대한 땅을 샀다. 그곳에 놀이공원을 만들고, 이름을 '네버랜드'라고 지었다. 피터팬이 사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들의 섬.


마이클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제 인생은 내 안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네버랜드에는 휠체어를 타고도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장애 아동용 특수 시설이 있었다.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자주 초대했다. 집 안에는 장난감과 피터팬 동화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자신처럼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1995년 발표한 'Childhood'라는 곡에 자전적 고백으로 담겼다.

"Have you seen my childhood?"
제 어린 시절을 본 적 있나요?


마이클 잭슨은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너무 일찍 데뷔해서 학교도 못 가고 친구도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이 없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유년기를 치유하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보듬으려 했지만, 세상은 그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언론이 만든 괴물


1980년대 중반부터 마이클의 피부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언론은 "백인이 되고 싶어서 피부를 표백했다"고 보도했다. 마이클은 자신이 백반증 환자라고 해명했다. 백반증은 피부 색소가 사라지는 질병으로, 흑인에게는 얼룩처럼 두드러져 보인다. 부위가 광범위할 경우 남아있는 정상 피부를 탈색하는 치료가 권장되는데, 마이클이 받은 것이 바로 이 치료였다.


하지만 타블로이드 언론은 그를 'Wacko Jacko(괴짜 잭슨)'라고 조롱했다. 네버랜드에 놀이공원을 만들고 아이들을 초대하는 모든 행동이 기행으로 포장되었다.


1993년과 2003년, 두 차례 아동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자, 언론은 연일 마이클을 괴물로 묘사했다. 1993년 사건은 합의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대중은 "돈으로 무마했다"고 받아들였다. 이어진 2003년 형사 재판에서는 긴 재판 끝에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10개 혐의 모두 "증거 없음"이었다.


그러나 무죄 판결 이후에도 언론이 만든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재판이 끝난 후 마이클은 네버랜드를 떠났다. 2005년부터 2009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그곳을 찾지 않았다. 꿈의 공간은 악몽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4년간의 침묵이 흘렀다.



This Is It


2009년 3월 5일, 런던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This is it. 이것이 마지막 투어가 될 것입니다."


12년 만의 무대 복귀였다.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50회 공연이 계획되었다. 티켓 판매가 시작되자 75만 장이 단 5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전 세계가 그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었다.


LA에서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영상 속 그는 여전히 완벽했다.

"사람들이 이 쇼를 떠날 때, '내 생애에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쇼였어'라고 말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만성 통증과 불면증으로 약물에 의존하며 공연 준비로 몸을 혹사하고 있었다.


2009년 6월 25일.

공연을 불과 며칠 앞두고, 마이클 잭슨은 주치의가 투여한 마취제 과다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팬들은 오열했고, SNS는 추모 메시지로 가득했다. 75만 명이 기다렸던 무대는 결코 열리지 않았다.


그해 10월, 리허설 영상을 모은 다큐멘터리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이 개봉되었다. 영상 속에서 그는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마지막 공연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았다.



무대 밖의 소년


1991년, 마이클 잭슨은 'Heal the World'를 발표했다.

어린 시절에도, 성인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상처받았던 그는 세상을 치유하고 싶은 진심을 이 노래에 담았다.


"Heal the world, make it a better place
For you and for me and the entire human race"
세상을 치유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요
당신을 위해서, 날 위해서 그리고 전 인류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내전 속에서 고통받는 어린아이들. 어쩌면 그는 그 아이들에게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주고 싶었고, 자신이 꿈꾸었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상처는 치유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넘었다.


문워크는 지금도 전 세계 무대에서 재현되고, 'Billie Jean'과 'Thriller'는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다. 그리고 'Heal the World'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의 음악은 영원히 남았지만, 그 자신은 행복하지 못했다.


여섯 살 소년은 무대 위에서만 행복했다.

무대를 내려오면, 그는 다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 헤매야 했다. 세상을 치유하려 했지만, 자신은 치유받지 못했다.


행복을 꿈꾸었지만, 행복할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

그것이 팝의 제왕 마이클 잭슨이었다.





이 연재의 마지막 주인공은 '마왕'이라 불렸던 신해철이다. 록 음악과 방송을 통해 시대의 목소리가 되었지만, 의료사고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그의 삶과 음악을 돌아본다.



Michael Jackson - Billie Jean (Motown 25주년 축하공연)


The Jackson 5 - I Want You Back


USA For Africa - We Are The World


Michael Jackson - Heal The World




참고자료

위키백과 - 마이클 잭슨
나무위키 - 마이클 잭슨
위키백과 - 마이클 잭슨의 죽음
나무위키 - 네버랜드 랜치
나무위키 - Heal the World
Wikipedia - Michael Jackson
Wikipedia - We Are the World
Wikipedia - Trial of Michael Ja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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