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새, 영원한 우희로 남다
80년대 중고등학생 시절, 시험이 끝나면 나는 친구들과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변변한 오락거리가 별로 없던 그 시절, 영화는 우리에게 작지만 소중한 일탈이었다.
그때 우리가 열광했던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홍콩영화'였다.
홍콩영화는 70년대 이소룡으로 대표되던 무술영화를 지나 80년대에 코믹 쿵후로 이어지며 성룡, 홍금보를 대스타로 만들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에는 주먹 대신 권총을 들고 싸우는 누아르가 대세였다.
주윤발, 적룡과 함께 장국영이 출연한《영웅본색》(1986)은 그 시대 사춘기 남자애들을 사로잡았다.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악당들을 처단하는 주윤발은 우리의 영웅이었고, 동생 역을 맡은 장국영이 직접 부른 OST '당년정(當年情)'은 영화만큼이나 사랑받았다.
그리고 80년대 말, 홍콩 판타지 영화의 막을 연 작품이 바로《천녀유혼》(1987)이었다.
왕조현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남학생들이 열광했고, 귀엽고 부드러운 매력의 장국영과 영화 속 애틋한 로맨스는 여학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장국영이 직접 부른 OST '천녀유혼, A Chinese Ghost Story'는 영화의 여운을 한층 깊게 하며, 그의 이름을 대중의 기억에 확실히 새겼다.
이렇게 장국영은 가수이자 배우로, 홍콩영화 황금기의 상징 그 자체였다.
장국영(張國榮, Leslie Cheung)은 1956년 홍콩에서 태어났다.
영국 리즈 대학교에서 섬유직물관리학을 공부하다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홍콩으로 돌아온 그는 1977년 아시아 가요제에 참가해 돈 맥클린의 'American Pie'를 불러 2위를 차지하며 데뷔했다. 그러나 초반 가수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무명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던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1983년, 일본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의 '이별의 저편에서'를 번안한 '풍계속취(風繼續吹)'가 히트를 치면서였다.
이어 1984년 발표한 'Monica(모니카)'는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그를 홍콩 최고의 가수 반열에 올려놓았다.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장국영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그의 중성적인 매력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진 그는 배우로서도 빠르게 성장했다.
《영웅본색》(1986)으로 누아르 장르에서 존재감을 각인시켰고,《천녀유혼》(1987)으로 판타지 로맨스의 아이콘이 되었다. 장국영은 단순히 잘생긴 외모를 가진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매 작품마다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하여 관객의 마음을 흔들었다.
노래할 때도, 연기할 때도 장국영은 빛났다. 두 세계 모두에서 정상에 오른 그는, 무대 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예술적 정점은 왕가위 감독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1990년, 왕가위 감독의《아비정전(阿飛正傳)》은 장국영에게 새로운 차원의 연기를 요구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채 자란 아비는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다. 여자들과 잠자리를 갖지만 결코 마음을 주지 않고, 끝없이 방황한다. 영화 속 아비의 대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가 되었다.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이 대사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끝없이 떠도는 아비의 삶, 그리고 그것은 훗날 장국영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처럼 들렸다.
영화에는 또 하나의 명장면이 있다. 속옷 차림의 아비가 선풍기를 틀어놓고, 하비에르 쿠가의 'Maria Elena'에 맞춰 홀로 맘보춤을 추는 장면.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춤추는 그의 모습은 외로움의 극대화였다. 화려하지만 쓸쓸하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갇혀 있는 영혼.
아비는 수리진(장만옥)과 루루(유가령)를 차례로 만나지만 결국 둘 다 떠난다. 그가 평생 찾아 헤맨 것은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였고, 필리핀까지 찾아갔지만 거부당한다. 그렇게 그는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라는 대사를 남기며 열차 안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아비정전》은 개봉 당시 흥행에 참패했지만, 장국영은 홍콩 금상장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이 영화는 왕가위 세계관의 출발점이자 걸작으로 재평가받게 된다. 장국영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93년, 첸 카이거 감독의 제안으로 장국영은《패왕별희(覇王別姬)》에 출연하게 된다.
경극 '패왕별희'는 초나라 항우와 그의 연인 우희의 애틋한 생사이별을 다룬 고전이다. 패왕 항우가 한나라 유방에게 패배하자, 우희는 항우를 위해 검무를 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는 이 경극을 평생 연기해 온 두 남자 배우의 이야기다.
장국영이 맡은 청데이(程蝶衣)는 어려서부터 경극학교에 버려져 '우희' 역을 훈련받는다. 여장을 하고, 여자처럼 걷고, 여자처럼 노래하며 평생을 살아온 그는 무대 위에서만큼은 완벽한 우희가 된다. 그리고 패왕 역을 맡은 단샬루(段小樓, 장풍의 분)를 무대 밖에서도 사랑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샬루는 청데이에게 늘 이렇게 말해왔다.
"우리 둘이 평생 패왕별희를 함께 하자."
청데이는 그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샬루에게 패왕은 무대 위의 역할일 뿐이었고, 무대 밖에서는 잘 생기고 인기 많은 배우로서 자신의 삶을 즐겼다. 결국 샬루는 홍등가 출신의 여인 주샨(菊仙, 공리 분)과 결혼한다.
청데이는 배신감에 무너지며 절규한다.
"안돼! 평생을 말하는 거야! 일 년, 한 달, 하루, 한 시진(時辰)이라도 함께 하지 않으면 그건 평생이 아니야!"
《아비정전》에서 "1분"의 무게를 말했던 장국영은 《패왕별희》에서 "평생"의 의미를 되묻는다. 청데이에게 샬루와 함께한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였다. 그런데 샬루는 무대가 끝나면 다른 삶을 살아간다. 청데이는 극과 현실의 경계를 잃고, 점점 우희 그 자체가 되어간다.
문화대혁명이 닥쳐오고, 청데이와 샬루는 홍위병 앞에서 서로를 비난해야 하는 지옥을 경험한다. 샬루는 청데이의 동성애를 폭로하고, 청데이는 주샨의 과거를 폭로한다. 주샨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77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두 사람은 다시 무대에 선다. 마지막 《패왕별희》 공연. 청데이는 우희로 분장하고, 샬루 앞에서 검무를 춘다. 그리고 경극 대사 그대로, 샬루의 허리춤에서 진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찔러 생을 마감한다. 극과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광둥어만 쓰던 장국영은 이 역할을 위해 표준 중국어(보통화)를 익혔고, 경극 춤도 전문가들이 인정할 정도로 완벽히 습득했다. 제작진은 대역을 준비했지만, 장국영은 모든 장면을 직접 소화했다. 칸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해외 언론들은 장국영을 "신인 배우"로 착각할 정도로 그의 연기는 경이로웠다.
《패왕별희》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장국영은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섰다.
장국영의 삶에는 늘 사랑과 외로움이 공존했다.
1989년, 그는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고 캐나다로 떠났다. 하지만 1995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해, 그는 콘서트 무대에서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을 부르며 17년간 함께한 동성 연인 당학덕(唐鶴德)에게 이 노래를 바쳤다. 비공식적이지만 사실상의 커밍아웃이었다.
같은 해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春光乍洩)》에서 그는 양조위와 함께 동성 연인을 연기했다. 영화 속 보영이라는 캐릭터는 사랑에 집착하고, 상처받고, 끝내 혼자 남는다. 《패왕별희》의 청데이, 《아비정전》의 아비와 닮은 영혼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홍콩 사회는 그에게 차갑게 등을 돌렸다. 언론은 그의 성 정체성을 조롱했고, 일부 팬들은 배신감을 드러냈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그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위장병도 악화되었고, 수면제와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2002년부터 그는 점점 공개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콘서트에서 그는 앵콜 무대조차 서지 못할 정도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토록 무대를 사랑했던 장국영이 무대를 거부한 것은 충격적인 신호였다.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친한 인테리어 설계사 친구와 점심 식사를 했다.
회색 정장을 입고 마스크를 쓴 그는 손을 떨고 있었고,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친구는 "요즘 힘들면 배드민턴이나 치러 가라"고 권했다. 장국영은 매주 화요일 당학덕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내게 전화할 필요 없다"는 뜻밖의 말을 남겼다.
오후 6시 43분,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장국영은 몸을 던졌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감정이 피곤해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날은 하필 만우절이었다. 많은 팬들은 처음에 언론의 만우절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발 없는 새는 결국 땅에 내려앉았고, 영원한 우희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4월 5일 추도식에는 SARS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팬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주윤발, 성룡, 유덕화, 매염방, 양조위, 장학우 등 동료 배우들은 눈물로 그를 배웅했다. 양조위와 양가휘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다 혼절하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유골은 당학덕에게 인계되었다. 위패는 홍콩 근교 보선사에 안치되었다.
장국영은 떠났지만, 그의 목소리와 모습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매년 4월 1일이 되면 전 세계 팬들은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 모여 그를 추모한다. 2005년에는 중국 영화 100주년 기념 '가장 사랑받는 남자배우 1위'로 선정되었다. 2013년 10주기 추모식 때는 홍콩 IFC 몰에 그의 대형 추모 석판이 설치되었다.
《아비정전》의 아비는 여전히 선풍기 바람에 몸을 맡기며 맘보춤을 추고 있고, 《패왕별희》의 청데이는 영원히 무대 위에서 검무를 추고 있다. '풍계속취', 'Monica', '당년정', '천녀유혼', '당애이성왕사(當愛已成往事)'는 여전히 울려 퍼진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무대 위의 찬란함과 무대 밖의 깊은 고독. 극과 현실의 경계에서 끝내 쉬지 못한 영혼. 사랑과 외로움 사이에서 영원히 머문 한 사람.
장국영은 《패왕별희》에서 우희가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죽지 않았다. 그는 발 없는 새였지만, 그가 날아간 궤적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장국영, 영원한 우희. 그가 부른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 회차에서는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이야기를 다룬다. Dangerous Tour의 압도적 퍼포먼스로 세상을 사로잡았지만, 무대 뒤에서는 평생 고통과 오해 속에 살아야 했던 행복해지고 싶었던 불운한 천재의 영광과 비극을 살펴보려 한다.
위키백과: 장국영
나무위키: 장국영, 아비정전, 패왕별희
Wikipedia: Leslie Cheung
장국영 사망 사건 관련 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