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인간의 노래
존 덴버는 카우보이 모자와 포크 기타로 기억된다.
그의 노래는 단순하고 따뜻했으며, 포근한 미소와 맑은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많은 이들은 그를 ‘햇살(Sunshine) 같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이미지와 실제 삶은 결코 같지 않았다.
독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사랑 노래를 불렀지만 진정한 사랑을 몰랐고,
환경운동의 상징이었지만 환경보호에 그리 일관된 진심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그의 노래를 사랑한다. 왜일까?
존 덴버, 본명 헨리 존 도이첸도르프 주니어(Henry John Deutschendorf Jr.).
1943년 12월 31일, 미국 뉴멕시코 로즈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 공군 조종사이자 비행교관으로 강직하고 엄격한 인물이었다. 존의 외가는 독일계 가톨릭 신자였으며, 어린 존에게 음악에 대한 사랑을 심어준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일곱 살 때 그에게 처음으로 기타를 선물했다.
아버지의 군 복무 때문에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고, 어린 존은 또래 친구를 사귀고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친구와의 작별이 반복되면서 점차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고, 홀로 자연을 벗 삼아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주와 변화가 반복되면서 그는 “늘 있어야 할 자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12살 무렵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기타는 그에게 친구이자 위로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텍사스 공대(Texas Tech University)에 진학해 건축을 전공했지만,
건축학보다는 음악에 더 마음이 끌렸다.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그는 본명 대신 ‘존 덴버(John Denver)’라는 이름을 썼다.
‘덴버’는 콜로라도주의 주도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던 도시였다.
이 이름에는 ‘언젠가 정착하고 싶은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1960년대 후반, 그는 포크 트리오 ‘채드 미첼 트리오(The Chad Mitchell Trio)’에 합류하며 음악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그룹 활동 중 외로움과 불안을 달래기 위해 ‘Leaving on a Jet Plane’이라는 곡을 썼다.
이 곡은 훗날 피터·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빌보드 1위에 올랐고,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솔로로 전향해 1971년 발표한 Take Me Home, Country Roads는 그의 인생을 바꾼 곡이었다.
웨스트버지니아를 노래했지만, 사실 그는 그곳을 방문한 적조차 없었다.
그가 말한 ‘집(Home)’은 실제 장소가 아니라, 마음속의 고향이었다.
그럼에도 단순한 멜로디와 가사는 미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곡은 1971년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올랐고, 이후 웨스트버지니아주의 공식 노래로 지정되었다.
그의 음악에는 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없던 고향을, 노래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1966년, 공연 중 만난 애니 마텔(Annie Martell)과 사랑에 빠졌고, 이듬해 결혼했다.
1974년, 그는 애니를 위해 'Annie’s Song'을 썼다.
“You fill up my senses, like a night in a forest, like the mountains in springtime.”
애니의 존재를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에 빗대어 표현한 이 노래는
단순하지만 진심 어린 고백으로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70년대 초, 부부는 콜로라도 애스펀으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평생 찾아 헤맨 고향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끊임없는 투어와 녹음 일정, 명성과 책임감은 부부 관계를 점점 멀어지게 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82년 이혼했다.
이후 그는 호주 출신 배우 카산드라 델라니와 1988년에 재혼했으나, 그 관계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런 문장이 남아 있다.
“나는 수천 명 앞에서 말하는 건 쉬웠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늘 말이 막혔다.”
사랑 노래를 불렀지만, 그는 진정한 사랑을 오래 지켜내지 못한 사람이었다.
존 덴버의 음악에는 늘 자연이 있었다.
'Rocky Mountain High'는 로키산맥의 웅장한 풍경과 자연 속에서 느낀 자유의 감정을 노래한 곡이었다.
그는 실제로 콜로라도 주에 정착하며, “이곳이 내 영혼의 집”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그는 환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핵 실험 반대 캠페인, 식량난 해결을 위한 세계기아위원회 참여, 그리고 1976년에는 직접 윈드스타 재단(Windstar Foundation)을 설립해 기후 변화와 산림 보호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모순의 그림자를 안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고 환경을 외쳤지만, 동시에 여러 대의 개인용 제트기를 보유했다.
그의 노래에서 찬사하던 로키산맥 기슭에는 거대한 저택을 지었고,
언론에서는 그를 “환경운동의 상징이자 위선의 아이콘”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세상을 바꾸려 한 사람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자연은 ‘신념’이기보다 ‘안식처’였다.
무대 위의 존 덴버는 언제나 따뜻했다.
밝은 웃음과 순수한 노래로 미국 중산층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무대 밖의 그는 충동적이고 외로웠다.
두 번의 결혼 실패 이후, 그는 알코올 문제로 체포되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포크 음악의 인기가 줄면서, 그의 앨범 판매도 급격히 감소했다.
음악계는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고 있었고, 그는 점점 과거의 상징으로 남았다.
한때 미국의 ‘국민가수’로 불렸던 그는 언론에선 ‘사라진 70년대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하늘은 그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아버지처럼 비행기를 몰며, 오직 하늘 위에서만 자유를 느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하늘이 그의 마지막이 되었다.
1997년 10월 12일,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해안.
그가 조종하던 실험용 비행기 롱이지(Long-EZ)가 바다로 추락했다.
연료가 충분치 않았고, 연료 전환 스위치가 좌석 뒤에 있었다.
사고 원인은 조종 미숙과 설계 결함의 복합으로 결론 났다.
그는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떠난 지 오래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세상 곳곳에서 들린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 —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노래.
멀리 떠난 이들에게는 그리움이고,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는 잠시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Annie’s Song —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단순하고 강렬한지를 보여준다.
그는 지키지 못한 사랑이지만, 듣는 이에게는 여전히 진심으로 다가온다.
Rocky Mountain High —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곡이지만, 사실은 이미 잃어버린 자연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으면,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이 떠오른다.
Sunshine on My Shoulders —
“햇살이 어깨에 닿을 때면, 삶이 조금은 더 나아질 것 같다.”
삶의 무게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 한 줄의 가사는 지금도 작은 위로가 된다.
그의 삶은 불완전했고, 때로 모순되었다.
하지만 그의 노래만큼은 거짓이 없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한 햇살처럼 남아 있다.
다음 이야기는 사랑과 외로움의 경계에서 영원히 머문 한 사람, 장국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무위키 : 존 덴버
VOA Korea : 미국 포크 음악의 우상, 존 덴버
Wikipedia : John Denver
Encyclopedia : Denver, John (1943-1997)
Britannica : John Denver Biography
Deseret News : John Denver was a Walking Contradiction (1997)
CultureSonic : The Other Side of John Denver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