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미소
새해 첫날 저녁 뉴스는 한 젊은 가수의 죽음을 전했다.
가수 서지원. 1976년 2월 19일생, 만 19세.
스무 살 생일을 얼마 앞둔, 미소가 아름다웠던 청년.
1994년 '또 다른 시작'으로 데뷔한 지 겨우 1년 2개월 만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뉴스를 보며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 밝은 미소의 청년이 세상을 떠났다니. 그것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니.
서지원은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났다.
유치원 시절 유학을 간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잠시 귀국해 서울용산초등학교에서 5학년까지 다니다가 다시 미국 LA로 완전히 이주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함께였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KBS 어린이 합창단에서 소프라노 파트로 활동했다. 타고난 목소리가 맑고 고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클래식 피아노는 10년간 이어갔고, 1987년 미국 LA로 완전히 이주한 후에는 Angels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음악적 깊이를 더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배우며 음악적 감각을 키워간 그에게, 음악은 그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일부였다.
음악적 재능뿐 아니라 빼어난 외모까지 주목받으며, 1990년부터는 GAP, ESPRIT, Levi’s 같은 글로벌 브랜드의 모델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음악에 있었다.
“가수가 되어 돈을 벌면 부모님께 멋진 집을 사드리고 싶다”
는 말을 자주 했을 만큼, 음악을 향한 열정과 함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속이 깊은 소년이었다.
1993년, 미국 LA에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서지원은 미주 중앙일보 등이 주최한 공개 오디션에 응시해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당시 그는 성적 우수자로 고등학교 조기 졸업 예정이었고 이미 UC 버클리 심리학과에 특례 입학을 앞두고 있었으나, 오디션 합격 후 대학 진학을 미루고 1993년 12월,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한국행을 택했다.
홀로 한국으로 돌아와 옴니뮤직에 발탁된 그는 작곡가 안진우에게 4개월간 노래 지도를 받고 3개월간 녹음을 진행했다. 그리고 1994년 10월, 마침내 그의 첫 앨범 《Seo Ji Won》이 세상에 나왔다. R&B 풍의 타이틀곡 '또 다른 시작'은 당시 주류였던 댄스 음악과 다른 결로 팬들에게 다가갔고, 그의 앳된 얼굴과 미성은 10대 소녀 팬들을 열광시켰다.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선 그의 얼굴에는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서지원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강렬한 비트와 반항적 이미지가 대세였던 1990년대 중반, 그는 미소와 미성으로 무대에 섰다. 훤칠한 키, 귀공자 같은 외모, 그리고 맑고 순수한 웃음. 가수 이현우가 “내가 만난 가수 중 미소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회상할 만큼, 그의 미소는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데뷔곡 ‘또 다른 시작’은 발매와 동시에 가요 순위 프로그램 상위권에 오르며 10대 팬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해 연말, 그는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신인상, SBS 스타상 등 주요 시상식의 신인상을 휩쓸며 최고의 신예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인기는 무대를 넘어섰다. SBS <생방송 TV가요 20>의 MC로 활약했고, 각종 CF 모델로 광고계를 장악했다. 드라마 <라이벌>, <남녀공학> 등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까지 시작했고,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출연도 확정되었다.
1995년, 그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청춘스타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와 환한 미소 뒤에는, 아무도 몰랐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1995년 늦가을 발매될 예정이었던 2집 앨범은 두 차례나 연기되었다. 처음에는 서지원의 건강 문제로, 다음에는 음반 심의 절차가 길어지면서였다. 결국 2집 발표는 해를 넘겨 1996년 1월 중순으로 미뤄졌다.
대중 앞에 선 그는 늘 밝은 모습이었다.
그해 10월, KBS 〈가족오락관〉에 출연해서도 그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2집 앨범을 준비 중이니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서, 앨범 발매가 미뤄질수록 그의 불안은 깊어지고 있었다. 1집의 성공 이후 높아진 기대는 이제 막 스무 살을 앞둔 청년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당시에는 외모가 눈에 띄는 남성 가수들에게 “실력보다 얼굴로 승부한다”는 편견이 따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번 앨범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그를 힘들게 한 건 음악적 부담만이 아니었다.
군 복무 문제, 소속사의 불합리한 대우와 과도한 일정, 수익 배분 문제와 생활고 등도 그를 힘들게 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회사에 이의를 제기할 만큼 성숙하지도, 그렇다고 무조건 감내할 만큼 둔하지도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점점, 아무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고립된 상태로 내몰리고 있었다.
1995년 12월 30일, 소속사 송년회에서 그는 2집에 대한 부담과 팬들의 기대를 걱정하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평소 밝고 예의 바른 이미지로만 알려졌던 그는, 그 눈물이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절박한 신호였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다.
환한 미소 뒤에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이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그 무게는 너무나 버거웠다.
1996년 1월 1일,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스무 살 생일을 앞두고 세상과 작별한 것이다.
비보는 곧장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다음 날 아침 신문과 뉴스는 일제히 “청춘스타의 충격적인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죽음을 전했다. 병원으로 달려온 수백 명의 10대 팬들은 밤새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동료 연예인들도 말을 잇지 못한 채 깊은 슬픔에 잠겼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며칠 전까지 텔레비전에서 보던 밝은 미소의 청년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2집에 대한 부담, 군대와 미래에 대한 불안, 가족과 팬들에 대한 미안함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에 너무도 험한 곳이고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다.”는 마지막 고백은 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떠난 지 열흘 뒤인 1996년 1월 11일, 유작 앨범 『Tears』가 발매되었다.
타이틀곡은 정재형이 작곡하고 김희탐이 작사한 '내 눈물 모아'였다.
‘내 눈물 모아’는 기적처럼 전국을 울렸다.
홍보 활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KBS , MBC, SBS 등 방송 3사 가요 프로그램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데뷔 첫 1위였다. 하지만 본인은 그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정재형은 훗날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에 출연해 곡의 후렴구에 나오는 가성 부분은 서지원이 가성을 내지 못해 자신이 대신 불렀다고 밝혔다. 데뷔한 지 1년 남짓, 아직 가성 발성을 완전히 익히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에게는 더 성장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내 눈물 모아'를 들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견뎌주었다면, 주변에서 그의 마음을 알아챘다면,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두 장의 앨범과, 방송 영상 속에 남은 그의 밝은 미소뿐이다.
만 19세.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 되기 20일 전. 너무 이른 이별이었다.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미안함. 그 환한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도 안타깝다.
서지원. 스무 살의 노래를 부르지 못한 청년. 그의 아름다운 미소는 여전히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서지원이 세상을 떠난 지 엿새 뒤, 또 한 명의 가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났다.
‘서른 즈음에’로 한 세대를 위로했던 그의 노래는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다음 글에서는 시대의 목소리로 불렸던 김광석의 삶과 음악, 그리고 그가 남긴 이야기들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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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유튜브 - 서지원 1월 1일에 생각나는 단 한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