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을 건너온 승전보, 글로벌 사업의 시작
2003년 11월 ‘일본 온라인 사업 시장조사’라는 명목으로 일본 출장을 다녀온 후 나는
'우리의 Next Market은 글로벌 시장에 있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당시 사업본부장이었던 김형석 이사에게 일본 시장에 진출해야 하는 이유와 성공 가능성에 대해 끈질기게 설득해 나갔다.
그는
"대기업도 하기 힘들다는 해외사업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대기업 계열사들의 CDN 사업 진출에 이어 우리에게 네트웍을 제공하는 기간통신사업자마저 CDN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로컬 CDN 사업자로서 한국에서만 사업을 하다가는 곧 경쟁사들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해외시장으로의 진출이 대안이라는 내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장님은 여전히 우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씨디네트웍스의 독자적인 서비스 플랫폼을 개발하고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만드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장님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지만, 영업팀장이었던 나는 고객과 Market을 잃으면 사업도 끝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해외시장 진출을 관철시키고 싶었다. 사실, 사장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해외사업은 투자액도 크지만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 사장으로서 가능성만 보고 투자하기에는 우리 회사는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안됐다. 고민 끝에 사장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고객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것도 사장님이 고민하지 않고 투자 결정을 할 만큼 크고 확실한 고객, 아니 최소한 2군데 이상의 '대형 고객들'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2004년 6월 두 번째 일본 출장길에 올랐다. 방문대상은 Nexon Japan, NC Japan, NHN Japan이었다. 이 회사들은 모두 한국에서 잘 나가는 회사였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낯선 신생기업일 뿐이었다. 그리고 운영팀의 핵심 멤버들이 본사에서 파견된 한국인이었다.
전 세계에서 한국인만큼 빨리 일처리를 하는 사람들이 없다. IT 업계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10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은 당시에는 아직 인터넷 비즈니스가 발달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인터넷 관련 엔지니어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당연히 일본에 진출한 한국계 온라인 기업의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IDC의 담당자들에게 부가서비스를 요구하면 이해조차 하지 못했고 기본적인 서비스를 요구해도 최소한 1주일 후에나 회신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24시간 대응해주던 CDN 서비스가 그리웠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일본에서의 느린 대응과 낮은 기술 수준에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3개사 담당자들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Q1) 한국에서 씨디네트웍스의 서비스는 어땠나요?
A1) 서비스도 안정적이고, 무엇보다 야간이나 주말 가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대응해 줘서 너무 좋았죠.
Q2) 씨디네트웍스와 비교해서 지금 일본은 어떤가요?
A2) 일본은 CDN이라는 게 아직 없죠. 인터넷 문화도 아직 정착이 안돼서, IDC 장애가 나도 실시간 대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요. 우리는 장애가 나서 초비상인데, 1주일 만에 답변을 주기도 해요.
Q3) 만약 씨디네트웍스가 일본에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어떨까요?
A3) 그럼 저희는 너무 고맙죠. 어서 와주시면 좋겠네요.
예상했던대로 지금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High Tech 기술이 아니라 빠른 응대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없고, 당연히 사장님을 설득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마음 속에 준비해온 본론을 조심스럽지만 돌직구스럽게 던졌다. 씨디네트웍스는 대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자금력과 조직이 취약해서 대기업처럼 해외 진출을 위한 선투자를 할 수 없다. 그들도 수긍했다.
그러니 우리 사장님이 결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계약에 서명해주면 그걸로 경영진을 설득해 일본에 투자해서 서비스를 제공할테니, 먼저 계약부터 합시다.
일본은 Backbone Carrier와 ISP 사업자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Nexon Japan 등 세 회사는 모두 중소규모의 IDC와 ISP 회선을 이용하고 있었다. Nexon Japan은 USEN이라는 공유회선 사업자로부터 1G Shared 회선을 50만 엔에 사용하고 있었는데 가입고객이 별로 없어서 500Mbps까지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200Mbps 정도의 트래픽이 발생한다고 했다. NC Japan은 IRI라는 중소규모 ISP로부터 1G Dedicated 회선을 200만 엔에 사용하고 있었는데, 트래픽은 역시 200Mbps 수준이었다.
그들은 씨디네트웍스가 일본에 와주기를 바라면서도 이미 계약한 회선 계약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이미 Nexon 등 게임사 유치 때 경험이 있었기에 그들에게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즉, 그들이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회선을 우리가 재 임차하는 것이었다. 만약 네트웍 용량이 모자랄 경우에는 일본은 아니지만 한국에 있는 우리 PoP으로부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하고, 이미 두 회사가 지불하는 네트웍비용에 서버 감가상각비와 운영 인건비 등을 추가하는 수준으로 단가를 책정하되, 최저 약정은 두 회사 모두 1Gbps로 계약해 줄 것을 요청했다. 200Mbps밖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1Gbps 약정을 요청한 이유는 해외사업 진출을 위한 엄중한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그 정도의 규모는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당장은 손해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조금 길게 보면 게임 서비스의 품질이 향상돼서 사용자가 늘어나면 트래픽이 금방 그 정도 수준을 넘어설 것이니 상호 이득이라고 설득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를 믿고 계약을 체결해주면 법인을 설립해서 서비스를 제공해 줄 테니 먼저 계약을 해달라는 나의 당돌한 제안에 고객이 동의해 준 것이 말도 안돼 보이지만, 그때는 서로의 needs가 통했는지 두 회사의 의사결정자들이 각각 계약 체결에 합의해 주었다.
일본 진출을 위해서 반드시 현지 서비스 계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출장을 계획하고 그들을 만나서 설득할 생각을 했었지만, 막상 그들이 계약을 해주겠다고 하자 나는 한국에서 첫 계약을 따냈을 때보다 더 감격하고 말았다. 너무나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한국에 있는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계약 성사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로 알리는 것보다는 좀 더 드라마틱한 방법을 택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도쿄의 테헤란로라 불리던 에비스에서도 제일 비싸다는 Ebis Garden Place에 입주해 있던 NHN Japan의 네트웍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PC를 빌려서 우리 회사 전 직원을 수신인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냈다.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가 사무실에 출근하자 만나는 사람들마다 “글로벌! 글로벌!” 또는
“계약서를 흔들며 현해탄을 건너오셨군요! 환영합니다.”
를 연호하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사장님 방에 들어갔더니 고사무열 사장은 2001년에 내가 첫 계약을 따냈을 때처럼 나를 포옹하며 “수고했다. 정말 잘했다. 그리고 이메일은 정말 감동적이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젠 글로벌이야! 글로벌 씨디네트웍스!”
라고 하시며 주먹을 불끈 쥐셨다.
이메일을 보낼 때 해외사업에 대한 인식을 한 번에 바꾸기 위해 일부러 의도했던 것이었지만 그토록 극적으로 바뀔 줄은 몰랐다. 그때부터 사장님은 일본에서의 서비스 제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건들을 승인해 주었고, 모든 회의나 간담회마다 글로벌 사업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운영팀의 적극적인 협조로 2004년 8월 드디어 Nexon Japan과 NC Japan을 위한 일본 현지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행히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일본어가 유창했던 운영팀의 이용진 사원이 일본 IDC와의 계약 체결과 시스템 구축에 큰 역할을 한 덕에 빠르게 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4년 9월 일본에서의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 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법인 설립 작업을 위해 법인장 예정자인 유승을 차장을 채용하고, 나는 그와 함께 일본법인 설립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파란만장했던 일본법인 설립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 13편에서 계속
1편 - 한국 최초의 CDN 전문기업 씨디네트웍스 탄생의 비화
3편 - 통신 3사의 공동 투자, 첫 번째 그림의 완성
7편 - 온라인게임 5개사 수주, 시장 개척을 통한 진정한 1위 도약
8편 - 국내 최초, 어쩌면 세계 최초 HD 고화질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12편 - 현해탄을 건너온 승전보, 글로벌사업의 시작
13편 - 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1
14편 - 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2
18편 - 해외사업을 넘어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한 조직개편 - 1
19편 - 해외사업을 넘어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한 조직개편 - 2
20편 - 글로벌 조직 운영을 위한 과감한 결단, Global PI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