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2
IDC를 정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사업 추진방안에 대해 고민했다.
정식으로 법인을 설립할 것인지, 연락사무소만 만들 것인지
아니면 합작을 할 것인지 등 진출 형태를 먼저 정해야 했다.
컨설팅을 받으면 편하겠지만, 아직 벤처정신이 충만했던 나는 돈을 쓰지 않고 직접 조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던 도중 당시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KIPA)에서 해외로 진출하려는 벤처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iPark라는 지원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자문과 제공해준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지 고객과 직접 계약을 체결하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현지법인을 설립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초기에 해외에 진출할 때에는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현지의 파트너와 합자회사를 설립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고객이 있었기에
파트너를 찾느라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또한 일본에 파트너가 있다고 해도 우리만큼 기민하게 움직여줄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힘들더라도 우리가 직접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초기 투자와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iPark Tokyo Center에서 운영하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그러나 심사 결과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에 우선권을 주는 내부 방침 때문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맨주먹으로 일본에 법인을 설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도쿄에 법인을 설립하기 위해 법인장 내정자로 뽑은 유승을 차장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도쿄에서 사법서사 및 관청 등을 돌아다니며 법인 설립을 위한 절차를 직접 알아보고, 사무실 임대에서부터 필요한 서류 준비까지 모든 작업을 혼자서 도맡아 했다. 일본어가 전혀 되지 않는 나는 체류비도 아낄 겸 본사에서 준비해야 하는 서류 등을 보내주면서 한국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힘든 과정을 거쳐서 법인 등록을 마친 2005년 1월 말, 드디어 유승을 법인장으로부터 모든 서류 준비가 마무리되었으니 도쿄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나는 신혼이었지만 아내는 말기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던 대학생 막내 처제의 병시중을 하고 있었다. 암병동에서 병시중하는 아내를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일본 사업을 벌인 장본인이었기에, 더구나 일본에는 CDN 경험이 전혀 없는 유대표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대표가 구해 놓은 첫 번째 사무실은 일본의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 정부 관청 등이 몰려있는 ‘국회의사당 앞 역’ 근처였다.
한국으로 따지면 여의도에 해당하는 셈이니 동네는 조용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하지만 사무실이 있는 건물은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고, 사무실은 벤처기업들이 창업 초기에 잠시 머무르다 갈 수 있도록 책상, 전화 그리고 인터넷을 제공하는 소위 렌털 오피스(Rental Office)였다. 유대표는 3개월간 사용할 목적으로 3인실을 빌렸다. 렌털 오피스 중에서 가장 작고 건물 한가운데 위치한 사무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창문도 없이 책상 3개만 덩그러니 있는
삼각형 모양의 사무실이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이 흐린 일요일 오후였다. 관공서만 있는 동네에 일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 길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지하철역에서부터 건물까지 힘들게 찾아갔는데, 도착해서 사무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늦은 점심이라도 먹을까 하여 혹시라도 문을 연 식당을 찾아 나섰는데, 관공서 주변이라 주말에 문을 연 곳이 없었고 1시간가량 헤매 다닌 끝에 간단한 식사를 파는 카페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오므라이스를 주문했는데, 첫 술을 뜨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느끼함과 함께 내가 앞으로 이렇게 답답한 곳에서 이런 음식을 주식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출장 올 때는 뭐든지 맛있었는데,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생각을 하니 왠지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차분히 생각하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도쿄에 문을 연 첫 해외 사무실이 아닌가?
우습게도 금세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는 유대표가 얻어 놓은 사택으로 향했다. 사택은 사무실이 있던 ‘국회의사당 앞 역’으로부터 지하철로 한 시간 반 가량 걸리는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오오미야구(大宮区, Ōmiya-ku, Saitama City, Saitama Prefecture)의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작은 빌라의 3층이었다. 왜 그렇게 먼 곳에 사택을 얻었는지 물었더니 도쿄는 임대료가 비쌀 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집을 빌리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 외딴곳에 있는 집마저도 도쿄외국어대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일본인 지인이 개인보증을 서주어서 겨우 얻었다고 했다. 그만큼 당시에는 일본 사회가 아직 외국인에게 배타적이었다.
거실 겸 주방과 방 2개가 있는 작고 깨끗한 빌라였다. 유대표가 가는 길에 귀띔을 주긴 했지만, 집에 들어서니 정말로 가구나 가전제품 하나 없이 덩그러니 집만 있는 상태였다. 한국은 온돌난방 덕분에 아파트나 빌라의 경우 자기 집에 난방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온기가 있지만, 온돌이 없이 온풍기로만 난방을 하는 빈 집에 들어서니 밖에 있는 것보다 더 추운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창문도 한국과 달리 이중창이 아닌 홑창 문이어서 1월의 찬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었다. 나보다 하루 전에 그 집에 들어간 유 대표는 맨바닥에 입고 간 잠바 하나만 덮고서 꼬박 하룻밤을 덜덜 떨었고,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마트로 가서 이불과 전기장판을 사놓은 덕분에 나는 그나마 잠자리에서 바닥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자려고 누우니 바닥은 따뜻한데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나왔다.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사택도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궁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벤처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벤처다운 궁색함이 좋았다. 한국 본사의 첫 사무실도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멋있고 고급스러운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공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시작했던 많은 이들이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간 데 비해서, 궁색하고 바보스럽게 보이긴 했지만 열정을 갖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10년이 넘게 꾸준히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 아침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을 타고 한 시간 넘게 출근을 하고 밤 10시 반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도쿄역 플랫폼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생활을 반복하기는 했지만, 그 해 가을 (변두리이긴 하지만) 도쿄로 사택을 옮기기 전까지 오오미야의 사택은 한 달에 한 명씩 파견직원이 늘어 나중에는 6명이 같은 공간에서 가족처럼 살면서 추억과 애환을 쌓았던 곳이었다.
법인 설립 과정은 힘들었지만, 다행히 실적은 좋았다.
법인 설립 이전에 고객을 확보해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인이 설립된 2005년 1월에 이미 매출액이 1백만 엔을 넘어섰고, 설립 원년인 2005년 한 해 동안 누적 매출이 1억 1천만 엔을 넘어섰다. 그뿐만 아니라 연말에는 월간 기준으로 손익분기점(BEP)을 달성했다. 이는 나를 포함하여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성과였고,
일본법인을 통한 성공적인 해외사업 진출은
2005년 7월 씨디네트웍스의 코스닥 상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법인이 설립되고 정상궤도에 올라서기까지 여기에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들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회사의 첫 해외법인이 설립되어 첫해에 이익을 내고 코스닥에도 상장되는 기쁨을 누렸던 2005년이 회사 창립 이후 5년 동안에 가장 기쁘고 즐거웠던 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 15편에서 계속
1편 - 한국 최초의 CDN 전문기업 씨디네트웍스 탄생의 비화
3편 - 통신 3사의 공동 투자, 첫 번째 그림의 완성
7편 - 온라인게임 5개사 수주, 시장 개척을 통한 진정한 1위 도약
8편 - 국내 최초, 어쩌면 세계 최초 HD 고화질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13편 - 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1
14편 - 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2
18편 - 해외사업을 넘어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한 조직개편 - 1
19편 - 해외사업을 넘어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한 조직개편 - 2
20편 - 글로벌 조직 운영을 위한 과감한 결단, Global PI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