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백일장 장원에 빛나는 시 한 편
1993년까지, 그러니까 군인 출신이 아닌 민간인이 오랜만에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에는 ‘교련’이라는 입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과목이 있었다.
교련은 입시에 전념해야 할 고등학생들이 남학생들은 모형 총을 들고 제식훈련과 총검술 훈련을 하고, 여학생들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구급치료하는 훈련을 받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과목이었다.
가끔 운 없게도 '교련 검열'에 걸리면 몇 개월 전부터 고3을 포함해서 전교생이 국군의 날에 볼 수 있는 사열(행진) 연습을 매일 2~3시간씩 뙤약볕에서 해야만 했다. 전교생이 단체로 총검술을 하고 사열까지 호되게 했는데,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동작이 안 맞거나 행진 중에 줄이 틀어지면 불합격을 받고 재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재검열에서도 불합격하면 학교장이 징계를 받는 서슬 퍼런 시절이었기에 학부모들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기에 고등학교에서 빌런은 대부분 교련 선생님이었다.
보통 장교로 임관해서 대위나 소령에서 예편한 전직 장교 출신들이 교련 선생님으로 활약을 했는데, 이 분들은 군인 출신들이 대통령부터 정부 요직과 국회까지 장악하고 있던 시대상황에 기대어 학교에서 가장 목에 힘을 주고 다니던 사람들이었다.
그분들은 학교의 빌런으로서 본의 아니게 수많은 에피소드를 양산하고는 했다.
우리 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두 분의 교련 선생님 중 유독 한분이 수많은 에피소드를 양산하여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졸업생들에게 안주거리를 제공해 주셨는데, 그분의 성함은 '오창록' 선생님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그분의 성함을 밝히는 이유는 오늘 소개할 에피소드가 그분의 성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 가을에 교지를 발행했는데, 교지의 꽃은 역시 백일장 당선작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산문 부문과 시 부문에서 장원에 뽑힌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가끔 뜻밖의 작품이 실리곤 하는데, 창피하게도 학교 축제에서 시화전에 출품했던 내 시가 나도 모르게 교지에 실렸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 해에 교지에 실린 시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교지에 실린 백일장 장원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
오월의 햇살은 부드럽게 내려와,
창공은 끝없이 푸르른 빛을 머금네
녹음 속 나무들은 속삭이며 잠들고,
개울물은 고요히 반짝이며 흐르네
새벽의 바람은 살포시 지나가고,
기억은 그늘진 나무 아래서 깨어나네
시든 마음도 어느새 되살아나,
발걸음은 조용히 꿈을 향해 걷네
새소리와 함께 빛나는 아침,
기대 속에 나의 마음은 깊어만 가네
그런데, 시를 반복해서 읽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각 행의 첫 글자를 세로로 읽으면 '오창록 개새기 시발새기'라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육두문자가 완성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감히 이런 시를 썼을까 하고 심장이 벌렁벌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를 쓴 학생은 빌런, 아니 오창록 선생님이 담임을 맡고 있던 반의 학생이었다.
이 놀라운 비밀은 금세 전교로 퍼져 나갔다.
학생은 물론 웬만한 선생님들도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지만,
오직 한 사람, 오월의 창공에 녹음이 우거지고 개울이 흐르는 마을에서 태어나셨을 것 같은 그 분만 몰랐다.
그 학생은 백일장에서 재미로 쓴 시가 당선될 줄 몰랐고, 게다가 장원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장원에 당선된 학생은 그날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고, 마침내 교지에 실려 전교생이 볼 수 있게 된 때부터는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에 본의 아니게 주인공이 되신 그분은 본인의 반에서 백일장 장원이 나온 것을 매우 기뻐하며 동료 선생님들께 자랑까지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오창록 선생님은 정말 모르셨을까?
학생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학생들의 저항은 대개 글을 써서 분노를 알리는 것이었다.
대범한 자들은 대자보를 붙였고, 소심한 자들은 익명의 낙서를 하곤 했다. 고등학교에서 전자는 저항의 대가를 치렀고 후자는 소리 없는 ‘좋아요’를 받았다.
이 학생은 백일장에서 친구들과 돌려보고 키득거리고 말려고 쓴 시가 대자보, 아니 교지에 영원히 박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창록 선생님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고양이도 도망갈 구멍을 보면서 쥐를 몰듯이, 당시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선생님도 이 정도의 귀여운 저항은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