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태풍이 지난 후 추석 단상
김 중 근
2003년 9월 12일-13일 지나간 태풍 매미로 전국은 물에 잠기고, 수마가 할퀴고 지났다. 추석을 맞아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됐지만 마음들이 무겁다. 비는 주룩주룩 오는데 산 까치와 까투리가 거센 바람 소리에 날개조차 가누지못하고 아득하다. 산과 논밭은 바람과 비로 가득 차 있어, 비에 젖은 근심 앞에서 수재민들은 망연자실하다. 논밭에 침수된 근심과 한숨 소리는 전선처럼 뻗어나간다. 하늘에는 어떤 혼령이 살고 있길래 간 밤에 어지럽게 울고간 장독대의 귀뚜라미는 검은 소리를 쏟아냈다. 절망의 소리로 애절하게 들렸던 지난 밤이었다. 마음만은 항상 넉넉하던 추석 분위기를 긁어내리는 소리로 들린다.
추석은 달빛이 가장 둥글고 깊어지는 밤, 그리움이 저마다의 가슴에 고요히 내려앉는 날이다. 들녘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가을 빛과 바람은 오곡백과의 향기를 실어 나른다. 우리를 시간의 깊은 골짜기로 데려간다. 가족들의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서, 헤어져 살았던 그간의 세월들을 눈빛만 보아도 그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기억 속 고향의 툇마루에는 송편을 빚는 손길이 분주하고, 웃음 소리가 구수한 가을 냄새처럼 번진다. 조상께 올리는 작은 정성은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의 기도이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가 된다. 흩어진 시간을 다시 꿰어 맞추는 따스한 실이 되는 셈이다.
그간의 고통과 고민들도 일시적으로 잊어버리고 침묵 속에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어도, 추석은 서로 귀 기울이게 된다. 함께 느끼면서 가족간의 우애와 잔잔한 기쁨과 사랑을 나누고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한 해동안 경작하고 수확된 추수물을 나누어 행복감을 맛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마음에 따로 담아두어 서운 했던 일도, 사랑하는 가족끼리 화해하고 풀어서 웃고 즐기는 그런 날이다. 헤어질땐 아쉬운 작별이 되기 마련이다. 마음에 찡하고 오는 진동이 헤어질 땐 아쉬움 뿐이다. 가족 간의 만남은 특별히 각별하기 때문이다.
자연과 함께 생업을 꾸려 나가는 사람들은 하늘의 기상이 도와 주어야만 잘 살 수 있다. 어찌 농부나 어부들 뿐이겠는가...민초의 마음도 한 마음이다. 그러나 태풍 매미호에 대한 일기예보 특보가 온 전국을 강타하고 추석을 침울케한다. 경기 침체 때문만은 아닐 것이지만 추석의 분위기는 간밤 해일과 곳곳의 침수로 뭉개지고 사못 전쟁터를 방불케하듯 초토화되었다. 삶은 산처럼 무겁다. 고통스런 바다와 같이 표현 못할 황망함과 고통스러움이 우리 모두의 한 가슴 언저리에 유입된다. 바닷가 모래 밭을 거닐며 산책을 하던 해변 산책로 주변 모두가 초토화 됐다. 바다 횟집, 포구에 정박했던 어선들, 한철 짭잘한 수입을 올렸던 민박집, 삶의 터밭인 양식장까지 이미 다 엎어지고 날아버린 추석 연휴이다.
농부들은 논 농사에 가느다란 희망을 걸고 있었으나, 다시 며칠 동안의 폭우 끝에 태풍 매미가 모든 삶의 의욕을 끊어놓았다. 태풍이 훓고 지나간 자리엔 오열과 참담함만이 자리 할 뿐이다. 다행히 내일은 청명한 가을 하늘이 높다고 예고한다. 한결같은 여느 아침과 같이 아파트 발코니 앞에 펼쳐진 황금 들판의 벼 이삭이 누렇게 패고 있다. 솔향이 가득한 앞산에는 흰색 솜털 구름과 하얀 백로가 한가로이 날고 있다. 그나마 오랜 장마와 태풍 끝에 그래도 끈질기게 잘 버텨준 황금 벌판이다. 추수하러 온 농부와 아낙이 쟁이를 몰고간 자리에는 시름을 딛고 일어선 희망이 무성하다. 벼알갱이가 달린 낱가리를 쓸어 내릴 때마다, 탈곡기에 두들겨맞은 낱알들이 상큼한 햇살을 되받아 튕기며 날아간다. 적당히 높은 오전 해의 햇살을 등지고, 머리를 끄덕거리는 경운기 위를 수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촌노는 하얀색 시멘트 농로를 걸어 나온다. 흥얼대는 노랫 자락에 모두가 즐겁다.
아직도 그간의 태풍과 빗물에 패여진 웅덩이마다 상형 문자처럼 고통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간 밤의 물자국처럼 속수무책 좌절하지 말고 논둑 길로 우뚝 올라서서, 한 철을 이겨낸 농부와 아낙의 풍요로운 마음같이 내년 추석 한가위에는 환한 웃음으로 둥근 보름 달을 맞이하길 기원한다. 달은 오늘도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빛을 건넨다. 그 빛 아래서 우리는 지난 계절의 수고를 위로받고, 내일을 향한 소망을 새긴다. 추석은 그래서, 단순한 명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가족간, 이웃간 삶의 완성을 잠시나마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다.
-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지나간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