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퇴직이 10년 남았다. 벌써 시간이 그리 흘렀나 싶을 정도다. 30대 끝자락에 결혼을 해서 그런지 멀게만 느껴지던 퇴직의 그날이 고속도로를 달려 우리에게 오는 듯하다. 올해 들어 퇴직을 준비하는 상사나 이미 퇴직한 분들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평상시에도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지만, 은퇴 이후의 삶을 이야기할 때면 이내 차분해진다.
오늘 만난 분은 기술사 자격증 2개로 바깥 활동을 하면서 돈도 벌고, 삼식이도 아니라 지낼만하시대. 나는 집에 있어도 상관없는데, 나가는 게 좋겠지? 삼식이가 되어도 넌 밥을 잘 챙겨줄 거 같은데...
누구보다 열심히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남편이다. 30평대 방 3개인 집에서 드레스룸을 개조해 책상 하나 놓을 공간에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 무언가를 쉬지 않고 한다. 그런 사람도 하루아침에 삼식이가 되어 아내의 눈총을 받는 남편이 될까 걱정스러운 가보다. 좀처럼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그도 다가오는 운명은 피할 수 없는지, 듬성듬성 보이는 흰 머리카락이 유난히 번쩍인다.
시아버지는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퇴직하셨다. 퇴직 이후 삼식이로 사시지만, 시어머니가 살뜰히 챙겨주시고, 스스로도 식사를 챙겨드실 만큼 독립적이시다. 시어머니는 자식들 앞에서 한 번도 식사를 챙겨드리는 일이 귀찮다는 말씀은 입밖에 내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빠는 대기업 하청 건설업체를 운영하셨다. 새벽 4시면 일어나 건설현장에 파견할 인부들을 점검하고, 지시하는 일로 아침은 항상 바빴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위해 묵묵히 아침 밥상을 365일 거르지 않고 챙기셨다. 60대 초반, 한창인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아빠의 노후가 어땠을지, 가끔은 지나가는 비슷한 연배의 노인을 볼 때마다 아른거린다.
결혼 전에도 후에도 남편은 내가 직장생활을 하든 안 하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원해서 7년간 해외 출장도 다니며 아등바등 비빌 언덕 없이 직장생활을 했다. 결혼 후 엄마의 뇌출혈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병원생활, 아빠의 사망, 그리고 나의 암 발병까지, 가끔 내 인생이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친 풍파가 올 때마다 남편은 말없이 곁에서 함께 했다. 지금도 그저 건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말뿐, 크게 기대하는 게 없는 듯하다. 말없는 사람이 가끔은 더 무섭다. 그래서 알아서 기어야 하는 걸까? 지금까지는 별 말없이 주부와 엄마로서의 역할에 최고는 아닐지라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현모양처도 아니고, 요리가 뛰어나진 않아도 밥은 잘 챙겨준다. 그래서 남편은 내가 끝까지 그럴 거라고 내심 믿는 듯하다. 그럴 것 같다. 내가 착해서가 아니고, 그저 같이 늙어가니까 살아온 날들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 같다. 그저, 서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 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미리 확언할 수도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경험하고 알아버렸다. 직접 몸소 겪기 전까지는 알 수 없고, 감히 누구를 평가해서도 안 되는 게 인생인 거 같다.
앞으로 10년 뒤엔, 삼식이라는 그 말이 퇴직해서 삼시세끼 부인이 해 주는 밥을 먹는 남편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게 급변하는 시대를 살면서 삼식이가 변화에 맞게 진화하고, 함께 사는 아내도 응원해 주면서 궁극엔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 주고 공동의 영역을 잘 운영해 나가는 원팀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끔 삼식이가 되지 않기 위해 은퇴 준비에 요리 배우기와 가사 분담하기 같은 전통적으로 아내의 영역이라 여기던 부분에 남편이 함께하는 영역으로 바뀌어가는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부모세대보다 독립적인 우리 세대에는 남편도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브런치 작가님들 중에도 살림에 능하신 분들이 꽤 있으신 걸 보면, 시대가 변하고 있긴 하나보다. 중요한 먹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은퇴를 준비하면서 여유자금과 여유로운 마음도 함께 준비하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으니, 슬기롭게 헤쳐나갈 우리 부부의 모습을 그려본다. 빽빽한 여행일정을 짜는 것도 힘들지만, 지키기도 쉽지 않고, 돌발사태에도 대처해야 하는 것처럼, 남은 인생도 목표는 분명하지만,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마음을 잘 가꿔나가고 싶다.
이 또한 현재의 마음일 뿐, 살아가면서 어떻게 변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미약한 인간의 마음을 용기 내서 여기에 적으며 나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