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6
우리는 5년 전 번역학원에서 만났다.
당시 수강을 완료하면 번역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광고하는 학원을 반신반의로 믿고, 큰 맘먹고 비싼 학원비를 결제하며, 6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오전을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문학번역가인 선배에게 결심을 알리니 나를 말렸고, 영문과 강사로 일하던 친구도 나를 말렸다. 원하면 출판사에 소개해줄 수는 있으니 수강하지 말 것을. 그 돈으로 차라리 여행을 다녀오라고. 그러면서 번역의 세계가 어쩌면 막노동보다 못한 고학력 저임금의 3D업종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덧붙였다. 기술 번역과 달리 원문의 느낌을 제대로 살려야 하는 문학번역이 쉽지 않은 것도, 영어와 국어 실력이 특출 나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하루아침에 번역가로 살기가 쉽지 않음을 어렴풋이 알았음에도,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수강을 결심했다. 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퇴사를 하고, 주부가 된 순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 누구의 조언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발을 들인 학원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제 목소리를 내며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 또한 수동적인 학생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할 말은 하는 주부 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교실에 앉아 집중했다. 영문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한 문장 한 문장 고민하며 번역하고, 수강생들끼리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이 힘든 줄 모르게 지나갔다. 우연히 말을 튼 그녀와 수업 후 카페에서 1시간가량 스터디를 하면서 번역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학원 출신이 번역한 책들이 광고될 때마다 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되겠지 하는 가슴 설레는 미래를 상상하면서 주말을 기다렸다. 마지막 주 수업을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암을 만나자 어떤 것도 할 자신이 없게 된 난 멈춰 섰다. 아쉽고, 또 아쉬웠지만, 암과 동행하며 장시간 골머리를 썩어가며 키보드를 두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와 달리, 그녀는 수강을 마쳤고, 책 리뷰를 하며 번역가의 길로 천천히 걸어가는 듯했다. 암 치료 동안에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며 본인의 진행상황을 알려주었다. 무엇보다 건강을 되찾으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북리뷰를 몇 번 하더니 더 이상 안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노가다도 이런 노가다가 없으며, 번역의 기회가 주어지는 사람은 이미 번역을 하고 있던 사람들, 즉, 번역가들이 그 학원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해줬다. 그렇게 나는 병 때문에, 그녀는 그 학원의 영업실태를 살짝 알고 나서, 우리는 번역하겠다는 의지로 막 솟아나기 시작한 싹을 더 이상 키우지 못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영어를 가르쳤던 과외선생이었다. 점점 나이가 들자 과외 말고 혼자서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번역을 생각했다. 나는 전공인 영어를 써먹으며 직장생활을 하다가 재택이 가능한 그러나 고생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번역을 택했다. 우리는 나이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만났다. 노력파라는 공통점과 함께, 뭐라도 하고 싶고, 뭐라도 해야지 삶의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우리였다. 그래서 나보다 7살 연상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최근에 소식을 전해왔다. 몇 달간 관광통역안내사 국가자격증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고. 4과목 필기시험(국사, 관광자원해설, 관광법규, 관광학개론) 공부를 하고, 무난히 합격했고, 면접까지 보고 결과를 기다린다고 했다. 입이 딱 벌어졌다. 역시나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독서모임, 영어회화, 방통대 수업 등 한시도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 열심히 외우고 공부를 했는데, 면접에서 예상밖의 질문이 나와 합격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당장 취업보다는 본인의 가능성과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도전했다고. 암기가 귀찮고 힘들었던 것보다 공부와 건강을 맞바꾼 거 같아 속상하다고 했다. 그랬다. 이제 우리 나이는 원하는 대로 공부를 할 수 없는 몸으로 살고 있다는 쓰라린 현실적 자각이 밀려왔다. 나도 아프고 나서 체력적 한계를 어느 때보다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암 치료를 마치고 바로 복직하거나, 다른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내 체력은 이리도 더디게 회복되고 있는지. 내 마음은 당장이라도 자격증이든 뭐든 공부를 하고 활동하고 싶어 하나, 정작 몸은 한 시간 이상 자리에 앉아 책을 보거나 집중하는 일이 힘들다고 자꾸 말한다. 눈은 침침하고, 몸은 슬며시 굳는 듯 뻐근해서 간간이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야 할 정도다. 가만히 생각 없이 있을 수도 없고, 몸을 놀려 할 수도 없는 답답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탈출 방법은 무엇일까? 주체할 수 없이 몰입할 수 있는 공부든 일을 찾으면 내 몸도 마음을 이해하고 협조해 줄까?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아있다. 은퇴 이후의 인생, 인생 2 모작이라는 말이 더 이상 특정 연령대를 겨냥한 말이 아닌 시대를 살게 되면서 100세는 아니더라도, 80세는 살 것 같은 긴 시간을 어떻게 준비할지 우리는 찾아 헤매는 중이다. 당장 60세까지, 아니 50세까지라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찾게 될 거라는 희망회로를 일단은 돌려보려고 한다. 나를 돌보고, 나를 살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