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사
33년을 성실하게 근속 하신 엄마에게 "우리를 어찌 키웠어?" 물으면,
"아랫돌 빼서 윗돌에 올려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라고 하셨다.
자녀 셋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교재비며, 수학여행비를 내야 할 때면,
엄마는 늘 '누구에게 돈이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셨단다.
이번 달 월급을 받으면 갚아야 하는 아랫돌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월급날이면 성실하게 빚을 갚고,
다시 다음 아랫돌 빼서 윗돌 메우며 우리를 키워내셨다.
한 번은 너무 어려워 큰 고모에게 돈을 빌리려 전화를 했더니
'있던 돈을 얼마 전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서 없다'라고 오히려 아쉬운 소리를 했단다.
이도 저도 빌릴 곳이 없어 다시 결혼반지를 맡기니
그때서야 돈을 꺼내 왔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많이 서운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남자인 아버지의 벌이가 없으니 우리 집 형편은 나날이 가난해졌다.
타인에게 호인이었던 아버지는 엄마가 겨우 모아 두 칸 방이 되어 살면, 본인 남동생 사업에 보태 주면서 방한칸으로 밀려났다. 동생은 빌려간 돈을 갚지 않아서 우리는 결국 더 가난해졌다.
부부싸움도 그 무능함에서 나왔다.
아버지에게 돈을 벌어오지 않을 거면 도시락이라도 싸게 쌀집하는 동생네 가서
"월급 받으면 갚겠다고 하고 쌀 몇 되만 빌려오라"라고 남편을 보냈다.
그때 아버지는 혼자 가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6학년인 나를 챙겨 갔다.
내게 어떤 상처가 남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거 같다.
아주 생생한 장면으로, 사진처럼 기억에 박힐 줄은 몰랐을 것이다.
막내 고모네 쌀가게 앞에서 쭈뼛거리던 아버지와 가게로 들어가선
"잠시 나가 있어"라고 하시곤
밖으로 나오시는 아버지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앞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집으로 가는 내내 조용했다.
퇴근하고 온 엄마에게 득달 같이 막내 고모한테 전화가 왔다.
'자기네 시누이는 혼자 살아도 지금껏 쌀을 빌려달라는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다. 자기가 남편을 볼 낯이 없다'며 소리를 질렀다. 자기 오빠의 무능함을 흉보는 게 아니라 열심히 살려는 엄마를 나무랐다.
그런 날도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다음날 네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거의 매일처럼 잔업하고 들어오셔 잠시 주무시고 네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6개씩 싸며, 평생을 그렇게 네, 다섯 시간 이상을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키워 내셨다.
내 아이들에게 고모가 하나 있는데... 그 고모에게 물었다.
"쌀을 빌려달라고 하면 나는 쌀뿐 아니라 조카들에게 용돈을 몰래 쥐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빈손으로 보낼 수 있지?"
"자기 오빠를 다그쳐야 하는 게 아니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언니(엄마)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던 고모는 "조카를 봐서도 그렇게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오빠보다 새 식구인 나를 아끼는 고모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에게 남들보다 못한 가족만 있었다.
결혼생활 내내 이런 고모 하나 없는 울 엄마는 외로웠겠다.
고단했을 우리 엄마의 삶이 글을 쓰는 내내 가슴이 시리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가 없는 지금, 그 마음이 느껴지니 먹먹해진다.
울 엄마는 자식을 의심하거나 매를 드신 적이 없다.
내가 거짓말을 해서 셋 중 나만 딱 한번 맞았을 거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아낌없이 준 사랑 덕분이라고 단언한다.
그 사랑은 언제나 넉넉했다.
매우 가난한 우리 집,
삼 남매는 모두 삐뚤어지지 않았다.
가난해서, 어려워서, 가정폭력이 있어서, 힘들기에 이런 것들이
우리의 서사가 되어 정당화 된 나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온전한 어른 하나 있다는 것으로
모든 불우한 환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경험한 사람으로
내가 바른 어른이 되어 주는 것,
아이에게 가장 '안전한 환경' 임을 깨닫는다.
*사진출처: pe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