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는 시애틀에서 만난 친구입니다. 저보다 한참이나 어리지만 속 깊고 정 많고 정말 착하고, 마음이 여리고, 모난 구석도 없고, 피아노도 잘 치고, 영어도 잘하고, 진짜 사랑이 뭔지 아는 아이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예의 바르고, 겸손하고, 작은 나눔에도 크게 감사할 줄 알고, 음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믿기지 않지만 세상에 이런 아이가 있더라니까요. 가끔 욱할 때는 궁시렁거리면서 나름 화를 내는데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입니다.
왜 썸머냐고, 혹시 ‘500일의 썸머’냐고 했더니 아니랍니다. 그냥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지은 이름이랍니다. ‘그럼, 난 오텀이라고 할까?’ 우리는 큭큭거리며 집에서 구워 온 쿠키와 과일을 나눠 먹었습니다. 썸머와 오텀. 이 귀여운 친구와 저는 정말 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친해졌습니다. 우리가 친구가 되었다니, 정말 너무도 다른 썸머와 제가, 이토록 즐겁게 시애틀의 눈부신 나날들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썸머와 저는 시애틀 근교의 와이너리와 바닷가, 멀리 등대가 있는 섬까지 주말마다 둘만의 짧은 여행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위드비 아일랜드는 계절이 지나고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갔습니다. 그 가을에는 썸머와 함께였습니다. 썸머는 그곳까지 가는 두 시간 내내 회사 얘기, 이탈리아에 갔던 얘기, 클럽에서 기타 치는 모습에 반했던 남자 얘기를 끊임없이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섬에 도착했습니다.
위드비 아일랜드에는 제가 좋아하는 하얀 등대가 있습니다. 늘 혼자서 이 등대에 와서 멀리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폭풍의 언덕처럼 바람이 불어와 온 몸이 떨리는 날에도 이 섬이 기억하는 먼 시간을 상상했습니다.
포트 케이시 주립 공원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선착장이 있습니다. 길 건너엔 낡은 카페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습니다.
썸머와 트레일을 따라 걷다가 언덕에서 주차장이 있는 아래쪽을 내려다본 그 순간,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 속 한 장면이 섬광처럼 떠올랐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그곳이 키스톤 카페였고, 그 남자가 여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장소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몇 번이나 쿠퍼빌 선착장을 지나갔고, 섬을 위아래로 드라이브하면서 해가 쨍하고 비가 오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모든 계절의 소리를 다 들었는데, 영화 속 남자와 여자가 서 있었던 바로 그곳에 주차를 했고, 키스톤 카페를 무심히 바라봤는데 그제야 알아보다니요.
저는 영화 속에서 나왔던 바로 그 장소라고 썸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둘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 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와 스크랩된 신문 기사를 보며 ‘역사적 현장’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마지막 장면, 여자가 혼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의자와 탁자도 그대로였습니다. 아마 당신도 이 영화를 보셨겠지요? 썸머와 그랬던 것처럼 당신과도 ‘그 남자와 그 여자’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섬세하고 쓸쓸한 연기를 풀어낸 배우들과 감독과 키스톤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Hey, It’s been a long time. huh?”
그 여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왜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요? 그건 아마도 영화 속 분위기와 색감과 공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그곳에 펼쳐져 있어서였을 겁니다. 갈 때마다 그 섬은 반짝이는 봄이었고, 싱그러운 여름이었고, 또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가을이었습니다. 도저히 안개가 잔뜩 내려앉은, 두 연인의 안타까운 이별이 가득 스며있던 막막한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너무나 평화롭고, 아늑하고, 반짝이는 곳이었습니다.
자욱한 안개가 쓸쓸하게 사람들을 감싸는 한적한 바닷가. 바닥에는 잡목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고 보트 램프 옆으로 낡은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불현듯, 갑자기, 여자에게 키스를 합니다. 슬픔과 절망을 감추고, 2분 27초의 길고 긴, 간절하고 아득한 키스 끝에 남자는 말합니다.
“I’ll see you here when you get out.”
안개가 걷히고, 차 창으로 비친 햇살에 깨어난 여자는 곁에 없는 남자를 찾아 밖으로 나갑니다.
여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남자를 찾아 헤맵니다. 양손에 든 커피를 다 쏟으며 뛰어가는 여자.
시애틀의 늦은 가을, 한 줄기 햇살처럼 짧은 사랑과 긴 그리움이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썸머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줬습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당신이 얼마나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지, 세상의 모든 기대와 두려움과 싸워가며 끝도 없이 노력하는지 담담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우연히라도 만날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우리가 만날 운명이라면 그때는 당신이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당신이 꼭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더 당당하고 멋지게 살고 싶다고 덧붙였습니다.
썸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창 밖을 바라봤습니다. 썸머는 시애틀에 온 것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듯했습니다. 지루하고 의미 없는 나날들 속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썸머의 나이 때 얼마나 열정적으로, 온 힘을 다해, 매일매일 기절할 것 같은 시간들을 버티며, 몸과 마음이 부서져라 자신의 일을 해 냈는지 말해 줬습니다. 전 그 시절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이 혼란스럽기만 했고 어떤 관계에도 몰두할 수 없었고 안정적인 그 무엇도 갖지 못했습니다. 썸머는 내가 갖지 못한, 또한 당신도 갖지 못한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전 사실 썸머가 부럽습니다. 썸머는 이제는 제게 없는 젊음과 강단 있는 의지와 영특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썸머에게는 그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고 지켜주는 가족이 있습니다.
썸머는 몇 번의 여행 동안 제가 살아온 얘기를 듣더니 연신 놀라워했습니다. ‘그리 놀라워할 일은 아니야. 썸머야.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아마 너도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그랬을 거야.’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온 저와 매 순간 자신의 선택과 최선이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온 썸머는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엔딩은 담담하게 문을 닫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헤어짐이 될 거라는 것을요.
그래요. 우리는 델마와 루이스도 아니고 썸머와 오텀이니까요.
썸머에게 지금은 안개가 너무 짙어서 잠시 쉬어가야 할 때라고, 지금이 그런 때라고,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라고 말해줬습니다. 긴 인생에서 보면 조금 돌아서 가도, 가던 길을 멈추고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도 괜찮다고.
저는 단지, 썸머에게 먼 훗날 미소 지으며 기억할 수 있는 며칠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그 남자가 여자에게 마법 같은 3일간의 시간을 선물했듯이, 당신이 저에게 시애틀에서의 아름다운 시간을 선물했듯이.
사진 몇 장을 보냅니다. 그날의 반짝이는 하늘과 바다가 사진에 다 담기지 않아 속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바다였는지, 그 하늘은 또 얼마나 드높게 맑았는지, 하늘과 바다의 색이 시시각각 어떻게 변했는지, 바람은 또 얼마나 경쾌하고 선선하게 나무들을 스쳤는지 다 보여주고 싶은데. 아, 당신이 위드비 아일랜드의 그 찬란한 시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서로 다른 시간 속 같은 공간에 서 있었다는 걸 이 사진들을 보면서 문득 깨닫습니다. 키스톤 카페도, 그 남자와 여자가 함께 했던 바닷가도, 카페 옆의 요트까지도 모두 예전 그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잘 있습니다.
썸머는 잘 지내고 있겠지요? 지금 이 순간 썸머가, 시애틀의 그 반짝이던 가을날이, 위드비 아일랜드의 등대가, 키스톤 카페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미치도록 보고 싶습니다.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