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시애틀 날씨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입니다. 집을 나서면 계단 아래 줄지어 선 나무들이 완전히 노랗게 물들어서 파란 하늘 아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바닥에 떨어진 마른 낙엽을 밟으면 바스락바스락,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데 이게 너무 재밌어서 아침마다 길가까지 갔다 다시 집 앞까지 왔다 하면서 한참을 혼자만의 놀이에 빠져 있습니다. 낮에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살짝 덥습니다. 이럴 땐 지구 온난화가 걱정됩니다. 시애틀까지 와서 지구 온난화를 걱정해야 한다니. 하지만 저는 금세 온난화고 뭐고 다 잊고 이 반짝이는 시월 눈부신 햇살에, 뒷목을 간질이는 상쾌한 바람에 몸을 맡깁니다.
Fall is in the air
학교 근처 카페 앞 작은 나무 입간판에 쓰여 있는 글입니다.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손에 들고 한참을 서성입니다.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하릴없이 기다림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갓 구운 바게트 빵, 작은 화분들, 상자 가득 쌓여 있는 과일들. 카페 옆 마트 직원들이 부지런히 물건을 나르고 정리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을 담은 커피를 들고 나오고 햇살은 아침 공기에 신선하게 부서집니다.
가을인가 봅니다. 가을의 기운이, 가을의 고소하고 씁쓰름한 냄새가 한가득입니다. 어느 순간 달라진 공기의 색깔과 밀도로 인해 길을 걷다 문득 놀라곤 합니다. 이 아름다운 시월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더 단단해진 일상 속으로, 익숙해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쿼터부터 수업 청강을 하고 있습니다.
Social Psychology
왜 사회심리학이냐고요? 그냥.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담당 교수는 첫 시간에 카리스마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산술적인 실수를 제외하고는 성적의 업다운은 절대 없다. 어차피 이런 문제로 문의하면 no라고 할 거니까 메일 보내지 마라. 만약에 내가 yes라고 한다면 그건 불공정한 거다.’ 젊고 아름답고 지적인 여교수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데 너무 멋져 보여서 속으로 감탄사를 마구 외쳤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큰둥한 표정입니다. 교수의 진지한 설명은 계속 이어집니다. 내 수업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할 것, 스낵 먹는 거 금지, 사과 먹는 건 허용, 단 소리 내지 말 것 등등. 왜 사과는 먹어도 되는 걸까? 소리 안 내고 어떻게 사과를 먹을 수 있지? 저 교수는 사과를 좋아할까? 이런 사소하고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전 다시 스무 살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황량하고 불안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던 그 시절.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한 번도 못 가본 엠티도 가고 싶고, 밤새도록 놀고도 싶고, 혼자 배낭 메고 발길 닿는 대로 여행도 하고 싶고, 무엇보다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가고 싶습니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또 다른 루틴. 매일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 새벽, 늦은 저녁 워싱턴 호숫가를 마구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살은 안 빠지고 몸만 튼튼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전 꿋꿋하게 달리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새벽녘 호수가 얼마나 신비로운 빛깔로 깨어나는지, 해지는 저녁 레이니어산이 하얀 고깔모자를 뒤집어쓴 채 어떻게 뒤척이는지, 이 미세하고 분명한 아름다움을 매일 바라봅니다. 조깅을 하고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십니다. 그리고 폭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리모컨을 누릅니다. 이 순간 NCIS라니! 아, 이렇게 사소하고 단순한 행복을 만납니다.
그런데 늘 이런 마음인 건 아닙니다. 정말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끝도 없는 절망과 부정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낮의 햇살 한 줌에 행복해하고, 희망과 긍정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까닭은 인생이 그리 길지 않으며, 이 시간 또한 곧 끝나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한번 내게 온 기회, 이 아까운 시간, 너무 소중한 이 시간을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끝없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채우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편지를 받을 당신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래요.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건,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매 순간을 마지막인 것처럼 소중하게 살기. 요즘 저의 일상입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있어 오늘 하루가 더 따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