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문턱에서 며칠 비가 오더니 또 완벽하게 화창한 날씨가 이어집니다. 이 즈음 워싱턴 호수는 황홀할 지경입니다. 가을이 저만치 보이는 까닭인지 산책길에 만나는 사람들의 걸음에 한결 여유가 느껴집니다.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근처의 나무들은 벌써 노랗고 붉은색으로 잎을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가는 여름의 뒷모습이 아쉽기도 하지만 애써 모른 척합니다.
지난여름은 일과 여행으로 바쁘게 지냈습니다. 미친 듯이 일하고 미친 듯이 놀기를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고 하면 당신은 또 피식 웃겠지요.
치열했던 그 여름 마지막 여행지. 뉴욕!
사실 뉴욕에 대한 환상은 전무했으나, 그래도 우아하고 자유로운 뉴요커의 일상을 조금은 누리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늘 예상은 비껴가고 계획은 깨지기 마련이니까요. 뉴욕도 그러했습니다.
JFK 공항에 도착한 다음 날, 뉴욕의 살인적인 주차요금과 교통 체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싶어서 그냥 렌트한 차를 몰고 쭉 갔습니다. 하지만 이 무모한 도전의 실체를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나타난 거미줄 같은 도로 지도를 보고 경악한 저는 그제야 폭풍 같은 후회를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맨해튼에 도착한 저는 진이 다 빠져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를 유령처럼 걸어 다녔지요. 영화 속 한 장면을 상상했지만 현실은 냉정하기만 했습니다. 자주 길을 잃었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곳은 얼결에 지나쳤습니다. 그러다 문득, 브로드웨이 어느 극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뮤지컬을 상영하는 극장이었는데 lottery ticket 추첨이 얼마 안 남았다고 직원이 소리를 지르더군요. 작은 종이에 이름 써서 내는 건데 당첨된 사람은 매우 저렴한 가격에 표를 살 수 있는 이벤트입니다. 한번 해 보자 싶어서 이름을 적었지요. 그런데 그날 뉴욕 한복판에서 제 이름이 깃발처럼 불려졌습니다.
뉴 암스테르담 극장은 마치 중세 오페라 극장처럼 웅장하고 섬세한 장식이 가득했습니다. 고풍스럽고 화려한 극장 곳곳을 둘러보며 이 유서 깊은 극장의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듯했습니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제 눈앞에 펼쳐진 신비의 세상.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을 너머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알라딘과 공주가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오르며 부르던 ‘a whole new world’는 정말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저를 데려다주었습니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살다 보니 우연처럼 이런 행운이 오기도 하는군요. 한번, 단 한번 내게 주어진 이 기회. 그리고 저는 또 꿈을 꾸듯 맨해튼 거리를 걸으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 당신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날 뉴욕의 거리에서 찾아온 행운처럼 그런 순간이 내게 온다면 전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여행 속 여행을 하는 기분입니다. 일상과 여행이 구분되지 않고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마음이 들떠서 조금 더 멀리 나가 봅니다. 그러다 다시 돌아와 또 떠날 채비를 합니다. 긴 여행 속의 짧은 여행이 되풀이됩니다. 문득 당신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봅니다. 지친 몸과 영혼을 위한 잠깐의 휴식일까, 이 전의 나를 벗고 또 다른 내가 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일까,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한 도전일까, 아니면 한 시즌을 끝내고 다음의 도약을 위한 숨 고르기일까. 그 무엇이든 당신의 여행에는 더없이 포근한 위안이 깃들었으면 합니다.
여행 끝에 남은 건 잔뜩 쌓여 있는 안내 책자와 지도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찍었던 사진들뿐입니다. 엄두가 나지 않아 여태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하고 그냥 쌓여만 있습니다. 아마 그렇게 먼지를 입고 시간의 무게가 덧대어져 기억 속에 잠기겠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라디오에서 그 음악을 듣게 되거나, 뉴욕이 배경인 영화 포스터를 보게 되면 선명하게 어제 일인 듯 제 눈앞에 그날의 풍경들이 펼쳐지겠지요.
이 즈음의 시간은, 시애틀에서의 이 나날들은 제게 인디언 썸머 같습니다. 깊은 가을 속에서 어느 한 때 반짝이는 시간들. 뜨겁게 다가온 나날들. 뜨겁게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랑.
제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미처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옆집에 사는 애나는 여름 내내 여행을 다니는 저를 보고 체력 진짜 좋다고 웬만한 사람은 그렇게 못 다닌다고 하더군요.
‘지금밖에 시간이 없어서요. 이번 여름 한 번 뿐이에요.’
그래요. 저에게 온 이 소중한 시간, 후회 없이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려고요. 단 한번뿐인 인생이니까요.
오늘은 시애틀 Seahawks 팀 풋볼 경기가 있는 날이라 아침부터 학교 주변 길들이 차로 꽉 막히고 온통 보라색 옷을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거리를 가득 메웁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풋볼은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라 삶 자체인 것 같아요. 유덥은 쿼터제라서 아직 새 학기가 시작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대학가가 붐빕니다. 거리 곳곳에 벅찬 응원과 웃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샀습니다. 서점 안을 구석구석 샅샅이 살펴보며 고르고 고른 책입니다. 이 책을 집어 들면서, 겉표지를 만져 보면서 당신의 손에 이 책이 가 닿을 순간을 상상하며 내내 행복했습니다.
인디언 썸머는 이렇게 끝이 나고 저는 또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리움의 흔적이 거기 여름날의 사진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갔던 그 장소, 그 시간 속으로 걸어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먼저 갔던 그 길, 그 도시, 그 공원을 거닐면서 저는 당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순간이 기다려집니다.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