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 무의미한 회의가 끝나고 다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본부를 빠져나왔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대안은 없고 이러다가 다 망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차가운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늦은 밤까지 계속된 회의에 우리는 배고픔과 피로에 찌든 얼굴로 힘없이 손을 흔들고 헤어집니다.
길고 긴 퇴근길. 어두운 밤 점점이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불빛을 따라 고속도로를 달리며 전 생각에 잠깁니다. 라디오에서는 어디선가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멘트가 흘러나옵니다.
몇 년 전 주말에 나와서 일하라는 보스의 무미건조한 문자에는 이런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꽃이 꽃으로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지천으로 핀 꽃이 꽃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고 저는 점점 지쳐갑니다.
봄인가요? 봄이 왔나요?
따스한 햇살은 창가에 내려앉고 후드득 벚꽃이 바람에 날리는 가슴 벅찬 순간이 올 겁니다. 쌉쌀하고 싱그러운 봄의 향기가 몰려와서 코를 찡긋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요. 봄이 왔나 봅니다. 믿기지 않지만 다시 이 신비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도 지쳤나요?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마음 편히 쉴 수도 없나요? 쳇바퀴 돌 듯이 지루한 일상에 갇혔나요?
저 또한 ‘쳇바퀴 돌듯이’ 특별할 일 하나 없이, 매일매일을 똑같이 살아갑니다. 시즌이 시작되면 제 오피스 문에는 스케줄표가 붙고 거기 쓰여 있는 대로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 정해진 미팅에 들어가고 정기적인 회의를 하고 페이퍼를 쓰고 퇴근을 하고 다음날 다시 일어나 또 조직 안으로 들어갑니다. 시즌이 막을 내리면 똑같은 다른 시즌이 시작되고 이렇게 돌고 돌다 모멘텀에 의해 멈출 수도 없게 됩니다. 이 쳇바퀴에서 단 한 번이라도 삐끗 잘못 발을 내딛게 되면 그대로 아웃되는, 참으로 서글픈 인생입니다.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이프 온리(If Only),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그리고 영화 하루.
똑같은 하루에 갇혀 버린 사람들이 거기 있습니다. 타임루프의 비극은 같은 하루를 반복하면서도 이미 반복된 수많은 하루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극악무도한 순환을 빠져나오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초기화되는 아침이면 진저리를 치면서 다시 익숙한 장면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하루의 어느 지점에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그 작은 틈으로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리고 우연히 당신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은 색이 바랜 우체통 위에도, 부드러운 솜털을 지닌 연둣빛 작은 잎에도, 꽃망울을 막 터트리기 시작한 나무의 가지 끝에도 있습니다.
알렉산더 포프는 인간론에서 ‘모든 우연은 그대가 보지 못하는 방향’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이 제 앞에 나타나면 아무렇지 않은 듯, 익숙하게 손을 내밀어 인사를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이 갑작스럽고 느닷없는 사건을 운명이라고 우겨보고 싶기도 합니다. 당신과 ‘우연’히 만났던 일. 이 어쩔 수 없는 사건을.
봄입니다.
사소한 일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어느 틈에 봄이 발 끝에 당도했습니다. 마음은 말랑말랑해지고 건조한 땅에서는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새싹이 솟아납니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지속되는 삶처럼 일상의 순간 위에 봄이 천천히 스며듭니다. 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하루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변주와 변형으로 조금은 다른 순간을 만들어내고, 그런 순간이 모여서 또 다른 하루가 만들어지고 그 하루는 다시 반복되겠지요. 그런 게 삶이 아닌가 합니다.
오래전 시애틀에서의 봄날, 튤립이 끝없이 이어지던 들판을 걷던 순간을 떠올리며 전 똑같은 하루 속으로 한걸음 내딛습니다. 당신이 있는 그 시간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