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바리바리 싸 온 책더미를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전방위적 범위를 아우르는 저 책들은 어쩌다 저에게 온 것일까요. 구겨진 페이지 속 한 구절이라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시애틀에서 서울로 긴긴 여행을 마다하지 않은 나의 다정하고 새침한 책들을 바라봅니다.
문득 당신의 서재는 어떨지 궁금해졌습니다. 굳이 서재라고 명명된 공간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고, 먼 시간을 상상하는 곳, 그곳이 바로 당신의 서재겠지요. 누군가의 서재를 궁금해하고 부러워하게 된 것은 아마 포털사이트의 ‘지식인의 서재’를 읽게 되면서부터 일 겁니다. ‘작가 ○○○의 서재’라는 제목 아래 ‘○○○의 서재는 ○○○이다’는 부제가 붙고 책과 인생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결하고 따스하게 스며 나옵니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추천하는 책들을 다시 찾아보고 그들의 서재가 어떻게 작품과 삶에 영감을 주는지 알게 되면서 저 또한 누군가 ‘나의 서재’를 궁금해하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제 서재의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집입니다. 오래전 그때 한 끼니를 저당 잡히고 서점에 들를 때마다 하나씩 시집을 샀습니다. 왜 하필 시였을까요? 어쩌면 시인들이 하나씩 길어 올린 고독의 언어들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한여름 열기처럼 뜨거웠던 청춘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바스러져가는 시집들만이 그 시절의 부끄러움으로 때로는 바보 같은 순수함으로 남았습니다.
그때는 무던히도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살아 숨 쉬는 것조차 팍팍했던 시절인데 어쩌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단순하고 순진무구한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도 쓸쓸한 단어들이 드리운 감정의 흔적, 종이를 넘기면 까슬하게 손끝에 남는 감촉, 희미한 나무 냄새 그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책들은 모든 근심과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저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공간에 앉아 있으면 저를 괴롭히는 모든 불온한 것들이 얼씬도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 숨어 있는 듯합니다.
저의 서재는 별 것 없는 작은 방일뿐입니다. 이전 집주인이 남기고 간 길고 긴 원목 책장과 한쪽 벽을 다 차지하는 긴 테이블, 버리기 아까워 책상으로 쓰고 있는 오래된 식탁, 빛이 바랜 의자 몇 개, 그리고 수많은 책들. 책들은 의자 위에, 테이블 위에, 이제는 바닥에도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은 온갖 오갈 데 없는 것들의 집합소이자,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의 누추한 거처입니다. 단순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를 지향하지만 실상은 복잡 다난한 제 마음을 닮아 이 서재도 온통 정신이 없습니다. 푸른색 벽만이 스탠드의 불빛을 거슬러 밤마다 옅은 그리움을 토해냅니다.
한쪽 면에는 커다란 창이 있는데 멀리 산과 나무들이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다른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서향인 까닭에 늦은 오후 무렵이 되면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오고, 어스름 저녁이면 불그스름한 노을을 담고 있는 하늘이 창 가득 펼쳐집니다.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나무와 하늘을 볼 수 있는 창과 볼품없지만 익숙한 편안함을 주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들이 있어 저는 이 서재가 참 좋습니다.
때로는 소탈한 작업실이 되고 어느 순간 삭막한 오피스가 되었다가 포근한 휴식의 공간이 되고 끝내는 반짝이는 창작의 공방이 됩니다.
이 작은 방에게 저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고 하루를 함께 합니다. 자주 글이 써지지 않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괴로워하다가도 이 공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문득 깨닫곤 합니다. 이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밥벌이를 위한 일을 하고, 무수한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커피를 마시고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지난한 생각의 그림자가 마침내 당신에게 이르렀을 때 저는 희미한 슬픔을 끌어안게 됩니다.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다가 깜빡이는 글자를 지우고 다시 몇 글자를 채워 넣습니다. 두 줄을 쓰고는 잠시 후 세 줄을 지우는 날들이 계속되면서도 저는 언젠가 이 방이 작가의 서재가 될 그날을 꿈꿉니다.
당신의 서재가 몹시도 궁금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결코 알 수 없겠지요. 당신이 어떤 커피를 마시고 어떤 와인을 즐기는지, 맥주는 혼자 마시는 걸 좋아하는지 여럿이 함께 마시는 걸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 보다 더 궁금한 것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입니다. 우리가 같은 책을 읽고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혹시 괜찮다면 당신에게 책 몇 권을 선물해도 될까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을 당신에게 보낼 수 있다면, 당신이 흔쾌히 그 책들을 받아 준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어느 순간 당신의 서재와 제 서재가 닮아 있지 않을까요! 우리 둘의 서재가 닮았다는 건 우리가 가장 인간적인 소통을 하고 있다는 소소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고 머릿속이 박하향으로 가득 찬 것 같습니다. 책장의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책들을 손 끝으로 만져 보면서 어딘가에 있을 똑같은 책들의 안부를 묻는 이 시간이 너무 따스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책을 읽으며 저녁 시간을 보냅니다. 당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책장을 넘기다 머그컵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십니다. 길고 흰 손가락은 책 모퉁이를 툭툭 건드리고, 반짝이는 눈동자는 생경한 단어들을 쫓아갑니다. 저는 낡고 오래된 그래서 삐걱이기까지 하는 의자에 앉아 지난밤 읽다 만 책을 펼칩니다. 무릎 담요를 끌어당기며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이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닮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