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이파리 몇 개가 나무의 영혼을 깨우더니 봄은 점점 그림자를 지우기 시작합니다. 계절이 지나는 일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이리 서글픈지요.
가끔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순간에 최선이었다고 애써 변명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맘대로 되는 건 단 한 개도 없고, 적당히 타협하고 신념을 버리고 열정을 짓누르며 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무엇을 위해 이러고 사는 건지, 꿈이라는 게 있기나 했던 건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요즘, 당신 힘들어 보여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외로워 보입니다. 문득 해맑은 미소와 장난기 어린 표정 뒤로 막막한 그림자가 보입니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아득한 눈빛은 깊은 고뇌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다정하게 미소 짓는 표정 뒤로 쓸쓸한 고독이 묻어납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의 괴리가 당신을 괴롭히는지요. 당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많은 일들이 당신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지요. 선택의 순간 두려움이 밀려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지요. 주변 상황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타협의 순간들 때문에 숨이 막히는지요.
이럴 때 우리는 불쑥 여행을 떠납니다.
낡은 캐리어에 필요한 몇 가지 짐을 챙겨 넣고 서둘러 공항으로 향합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옆 의자에 앉아 분주한 밖을 보고 있으면, 그제야 이 한없이 가벼운 일탈이 실감 납니다. 그리고 마치 방금 전까지의 기억은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공간과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이렇게 이해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
그의 담담한 고백에 기대어 보자면, 저 또한 당신이 만든 세상을 여행하는 남루한 옷차림의 여행자입니다. 놀랍도록 신기한 세상으로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여행자.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가도 금세 힘들어 주저앉고, 때론 여행에서 만난 당신이 지쳐 보여 마음 아파하기도 하지만, 결국 다독여주지도 못하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여행자. 이국의 조그만 기차역 벤치에 앉아 쓸쓸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에게 사소한 안부라도 건네고 싶은데,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당신의 평안을 기도하는 소심한 여행자.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낯선 길가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을 떠올리며 다시 여행의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당신은 저를 리스본의 어느 골목으로, 포르투의 고즈넉한 서점으로, 신트라의 인적이 드문 바닷가로 불렀습니다. 전 두려워 주저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나와 같이 이 신기한 마법 같은 세상으로 떠나자고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또 말합니다.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고. 당신, 오직 현재를 살고 있나요?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당신 마음이 향하는 그 길로 주저하지 말고 떠나세요. 있는 힘을 다해 현재를 딛고 일어서 아무도 가지 않는 그 길로 한 걸음 내딛으세요. 그저 한 줌의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몸은 일상 속에 두고 온 영혼은 일상의 부재인 그곳으로, 당신이 있는 그 세계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렇게 힘든데도 매번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 순간, 그 시간만이 내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 때문일 겁니다. 오직 현재를 사는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고 다시 척박한 현실 속으로 돌아오면 저는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낮과 밤, 여름과 가을, 만남과 헤어짐, 그 미세한 경계마다 꽃이 피고 지고, 저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가끔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가도 다시 힘을 내 이 고단한 길을 걷습니다. 결국 저는 이 소란스러운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겁니다.
내가 더 단단하게, 오직 ‘나’로 살아갈 시간들이 여기, 이곳에 있으니까요.
길 위의 그날들이 쌓여 당신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당신의 그날들이 저에게 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