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하기 좋은 날
오래전 일이다. 마지막 학기 최종 시험이 끝난 후 탈진해 있던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남쪽을 향해 차를 몰았다. 바다를 봐야겠다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북쪽으로만 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바다에 당도하게 되어 있다. 굳이 남쪽으로 갈 필요도 없었는데 그렇게 달려 통영까지 갔다. 아니, 정확히는 끝까지 가보니 거기가 통영이었다. 항구에 차를 주차하고 바다를 보는데 여기가 땅끝인가,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바다네, 바다구나, 바다에 왔어.’
갑자기 막막해졌다. 목표를 달성하고 난 후 밀려든 허탈감과 방향을 상실했음을 지각한 후 들이닥친 당혹감으로 휘청거렸다. 그즈음의 내 심리 상태는 그랬다. 현재는 별 볼일 없고 미래는 까마득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오후의 지루한 햇살이 내 곁을 맴돌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힘없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배를 타고 섬에 갈 수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된 나는 매표소로 달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사량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나라에 발음도 이상한 ‘사량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그날 처음 본 사량도는, 사량도에서의 며칠은, 그 가을날들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이런 무계획주의자가 ‘미서부 해안가를 로드 트립 해 볼까?’라는 상당히 기특한 마음을 먹으면 대략 이런 식이 된다.
1.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등 아무 데나 일단 간다.
2. 공항에 내려 되도록 큰 차를 렌트한다.
3. 근처 마트에 가서 먹을 것, 텐트 뭐 이런 잡다한 것을 왕창 구입한다.
4. 서부 해안가를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손가락 끝 말단 세포까지 철저한 계획주의자인 친구는 미국에서 그렇게 여행하다간 ‘죽는다’라고 경고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나는 혼자서 미국으로 날아가 저렇게 여행하진 않았다. 하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은 해 볼 생각이다.
대체로 혼자 여행 가는 편이지만 가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게 될 때가 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는지(아니면 억세게 운이 없었는지) 여행 계획을 PT 보고서로 작성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들과 한 팀이 되었다. 어쨌든 우리는 종이로 뭘 봐야 마음이 편하다.
한 번은 친구가 떠나는 날 차 안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주는데 여행 갈 지역의 상세 지도, 숙박할 호텔 정보, 여행 경로, 날씨, 주변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빼곡히 기록된 그야말로 논문 수준의 파일이었다. 나는 대충 쓱 보고는 휙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데?’라고 물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천하태평 무계획주의자가 철두철미 계획주의자와 평화롭게 여행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 절대 토를 달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뭘 먹든, 어디서 자든. 다행히도 난 머리만 대면 땅바닥에서도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고, 오랜 시간 안 먹어도 잘 버티고, 눈에 보이는 건 다 신기해하는 스타일이다. 사실, 무계획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되는대로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토를 달 이유도 없거니와 괜히 궁시렁거리면서 평화를 깨뜨리는 무모한 행위는 안 하는 게 좋다.
둘째, 칭찬을 해 준다.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을 잘 세워서 무사히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즐겁게 놀고, 편히 잘 쉬다 갈 수 있었다고. 이건 빈말이 아니고 사실이다. 안 그랬으면 길바닥에다 신문지 깔고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계획주의자들은 엄청난 시간을 들여 계획을 짜고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고 고심해서 최선의 결정을 한다. 나 같은 무계획주의자들은 그냥 따라나설 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노고와 눈물겨운 헌신에 감사하고 시도 때도 없이 칭찬을 해야 한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지 뭐야. 넌 정말 대단해!’ 그러면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음에도 이런 대책 없는 무계획주의자들을 여행에 끼워준다.
셋째,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준다. 여행을 하다 보면 분명히 예약했는데 캠핑 사이트 자리가 없다고 한다거나,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대로 갔는데 전혀 엉뚱한 장소가 나온다거나, 휴관일도 아닌데 내부 사정으로 박물관 문이 닫혔다거나 하는 일들이 생긴다. 아무리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도 예상치 못한 일들은 종종 발생한다. 단언컨대, 원래 인생이란 게 그런 거다. 무계획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이렇든 저렇든 별로 상관이 없다. 하지만 계획주의자들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진다.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도 참을 수가 없고 또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에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럴 때는 ‘괜찮아’라고 한마디 해 주는 거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이 참에 캠핑 말고 호텔에서 묵을까?’, ‘박물관 말고 저 옆에 공원에 가볼까?’ 이런 한마디가 계획주의자의 차가운 심장을 녹인다.
지금 당장 차를 몰고 동쪽, 서쪽, 남쪽 어디든 차로 달린다거나, 공항으로 달려가 ‘아무 데나 빨리 출발하는 걸로 비행기표 하나 주세요’라고 할 수는 없다. 현실은 냉혹하고 개뼈다귀 같은 일들이 툭툭 튀어나와 발목을 잡는다. 점점 뭔가를 시도하는 일이 힘들어지고 하나 둘 포기하다 보면 무기력한 일상만 남게 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이 반복된다.
이 무한 반복의 슬픈 쳇바퀴 속에서 오늘도 나는 한없이 가벼운 여행을 떠난다. 마스크를 잘 쓰고 발에 잘 맞는 편한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선다. 그리고 아무 곳이나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익숙한 곳이지만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작은 움직임이, 낯선 바람이 말을 걸어온다. 이제 곧 골목길 끝에서, 줄지어 선 나무들 사이에서, 새로 생긴 카페 앞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모든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