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가 SKY를 설득하는 방법

배짱과 신뢰만 있으면 된다-1

by 킹구라

내 삶은 늘 어중간했다.

노래를 제법 잘하기는 하나 뛰어나진 못 했고 기타 연주 또한 프로들의 실력에 비할바가 못되고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그렇다고 부유한 것도 아니었으며 외모와 키 마저도 어중간한 사이즈였으니

공부 머리 또한 이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듯했다.

평범한 성적에 평범한 지방대 입학, 이러한 출신들의 사회생활은 대부분 이름 없는 중소기업에서 시작된다


물론 화학공학을 전공한 지라 일반 사무직들에 비해 직무 경험 쌓기엔 어느 정도의 베네핏(Benefit)도

존재했다.

백금촉매 (Platinum Catalyst) 연소기술 개발 프로젝트에 당시 다니던 회사가 실시기업으로 선정되어

지방대 출신으론 쉽게 경험할 수 없던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KIER)에서 기술 연수를 받을 기회도 있었는데

평범한 지방대 출신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온 박사들의 티칭을 제대로 따라가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았다.


그렇게 힘든 연수과정을 끝내고 이름 없는 중소기업 소속이었지만 나름 신기술 개발에 참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다니던 어느 날 IMF가 터졌다.

국가 부도라는 비상사태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도 비상경영에 돌입, 정리해고 및 권고사직 등의 인원감축

등을 단행했고 그 유탄은 지방 중소기업들에게도 직격으로 떨어졌다.

기초가 단단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은 직접적으로 매출을 발생시킬 수 있는 부서를 제외한 관리부 등의

지원 부서를 포함하여 투자비의 IN PUT 대비 OUT PUT 이 전혀 없는 연구소 정리가 최우선 과제였다

말인즉슨 연구소 직원들도 직접 필드에서 영업을 뛰어 매출을 발생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소 입장에서는 백금촉매 (Platinum Catalyst) 연소기술에 대한 원천기술만 보유하고
있을 뿐인 데 지금 당장 제품화, 상품화하여 매출을 발생시키라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라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되는 법, 회사 방침이 정해졌으면 따를 수밖에 없다

인원감축 열풍이 몰아치고 있던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 때 불만 있다고 함부로 퇴사해서는 그 이후를

보장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연구원, 엔지니어의 허울을 덮어쓴 세일즈맨의 생활이 시작됐다.

세일즈(영업)라는 게 별 다를 것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는 세일즈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분야는 원천기술에 대한 이해, 기초 화학에 대한 이론 등을 갖춰야만 가능한 것이라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하며 약해지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문제는 촉매 연소기술을 상용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대상은 삼성, 엘지, SK와 같은 대기업들

뿐인데, 과연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제안에 관심이나 보일까 하는 우려였다.

그러나 고민만 하고 있기엔 주어진 시간이 부족했기에 바로 실행에 옮겼다.

연소 기술과 관련된 대기업 직군들을 살펴보는 중에 SK가스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망설이면 끝도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기에 거침이 없었다

대표전화로 담당자와 연결된 후 간략한 회사 소개 및 기술 소개를 하니 다행히 관심을 보였다.

내친김에 SK가스 서울 본사 미팅 날짜까지 잡았으나 (현재는 판교로 이전) 또다시 고행길이 시작됐다.

소개자료 준비부터 브리핑 순서 및 향후 계획수립 등 모든 준비를 혼자서 다 했다

중소기업 생리가 원래 그렇다. 부실한 백데이터는 물론 대기업과 프로젝트를 해 본 적이 없는 상사들.

어느 누구한테도 조언을 받지 못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으로 26살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해당 기술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에서 직접 연수도 했거니와

당시 티칭을 해줬던 박사님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가장 공을 들이고 꼼꼼하게 준비했던 것이 바로 "예상 질문노트" 작성이다.

이는 후술에도 나오겠지만 브리핑 시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도 의연하게 대처하여 발표자의 발언에

신뢰를 줄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되기도 했고 청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학문적 이론도

보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팅 당일, 촌놈의 서울 상경기가 시작됐다.

지금은 판교로 이전했지만 당시 SK가스 본사는 서울 63 빌딩에 위치했다.

그 시절엔 노트북이 귀했던 관계로 손에는 달랑 서류가방 하나만 든 채 거대한 빌딩 앞에 선 촌놈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처럼 두려운 감정이 올라왔는데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잘 차려입은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간 미팅룸에는 이미 SK 담당자가 배석해 있었고

간단한 상견례 후 자리에 앉으며 일대일 미팅이란 사실에 일단 마음을 놓았다.

다수를 설득시키는 것보다 집중 공략이 가능한 한 명 정도는 쉬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뀐다. 아니 두려움으로 바뀌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 이제 일어나서 자리를 옮기시죠? "


SK 담당자 말에 그를 따라나설 때 만 해도 별다른 의심은 안 들었다.

타 부서 담당자의 조언이 필요한가 정도의 생각만 가진 채 그를 따라간 그곳은

맙소사!

살면서 처음 본 엄청난 규모의 회의실에 배석한 인원만 해도 열댓 명이 넘어 보였다.

이때부터 사시나무 떨리듯 손발이 떨리기 시작했으나 애써 태연한 척 침착함을 유지한 체

배석 인원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상견례를 했다.

미팅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배석한 인원들의 면면도 화려했는데 받아 든 명함을 보니 그룹장부터 시작해서

석박사 출신의 연구소 소속이 대부분이라 시작도 하기 전에 먼저 주눅이 들었다.

또한 그들이 SKY 출신들이란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에겐 비교적 생소한 신 기술에 대해 조목조목 따질 요량으로 브리핑 멘트를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경청함은 물론 질문을 하는 서두엔 "저의 스승이었던 (S대, K대, Y대) 모 교수님의 논문을 보면,,,," 등의

화법으로 은연중에 본인을 과시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때 내 나이는 고작 26살.

사회 초년생이자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문적 소양이 부족한 지방의 사립대 학부 출신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승패가 뻔한 체급이 심각하게 차이나는 싸움이라 내가 내세울 건 배짱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브리핑 전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말했다


"기죽지 말자"

"이것은 신기술이다. 저들에겐 생소하지만 나는 전문가다"

"스펙이 아무리 좋다한들 이 자리에서 나만큼 아는 사람은 없다"

"지금부터 이 사람들은 바보들이고 내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깔보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결국 세일즈 비즈니스에선 설득하는 자와 설득당하는 자와의 싸움이다.

또한 모든 싸움의 승패는 시작 전의 기세가 좌우한다.

전반적인 학문적 소양은 그들이 더 뛰어날지 몰라도 단편적으로 한 분야로만 압축했을 때에는

체급차가 나더라도 해볼 만한 싸움이라 생각했다.

기저에 이러한 심리를 깔아놓고 그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니 처음 마주했을 때 보단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서인가 어투에도 힘이 실렸으며 명확한 발음전달로 회의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날카로운 브리핑이 이어졌다.

비교적 가벼운 일방통행이었던 브리핑이 끝나자 심화학습과도 같은 양방통행인 질문의 시간이 왔다.

접촉사고의 위험이 있는 양방통행인 질문시간은 거의 면접시험과도 같았다.

비즈니스 세일즈에 있어 성패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음에도 난 오히려 담담했는데 앞서 말한

예상질문노트를 준비해 뒀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질문의 창들을 막아낼 방패 말이다.

다행히 질문의 내용들은 내가 예상한 범주 내에 있었다.

그리고 답변 또한 이미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박사님들에게서 받아 놓은 터라 거침이 없었다.


아무 준비 없이 가진 것 없이 배짱만 부린 게 아니었다.

비즈니스란 전쟁터에 나가기 전 충분히 무기를 갈고 다듬어놨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배짱이었다.


준비된 모든 시간이 끝나고 수고하셨다는 SK 담당자와 악수를 한 후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그룹 차원에서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순간 지방대 학부 출신이 SKY 석박사들을 설득시켰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철저한 준비와 한 분야의 전문성을 보유한다면 스펙 따윈 허울에 불과하다.

거기에 조금의 배짱만 첨가하면 된다.



다음 편은 내가 독립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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