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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께살기연구소 May 23. 2023

헌법 따로, 법률 따로, 관행 따로

우리나라 성평등의 불연속 구성

지난 20여년 동안 세간의 큰 관심을 받은 것들 중 하나는 저출생이다. 2004년 이후 정책을 세우고 예산을 투여했음에도 오히려 합계출산율의 하락은 멈추지 않았고 관심 또한 갈수록 커져 왔다. 저출생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분석하다가 우리나라의 독특한 점인 ‘헌법 따로, 법률 따로, 관행 따로’를 새삼 한 번 더 느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권리 특히 성평등에 입각한 여성의 권리가 무시당하고 있음은 누구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성불평등은 여성이 일터에서나 삶터에서나 언제나 겪는 일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의 성불평등은 결과적으로 결혼과 출산의 회피를 낳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법체계에서 가장 고점에 있는 헌법은 성평등과 성차별 금지를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정 또한 우리 헌법사에서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헌법의 규정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했을까?


우리나라의 현행 헌법은 제11조 제1항에서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 조항 만을 놓고 본다면 이론적으로나 법리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활동 영역에서 성불평등은 존재해서는 아니 된다. 뿐만 아니라, 제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가족을 이루는 공식적인 과정인 결혼과 가족 내의 역할과 기능들의 성별 배분에 있어서 성평등이 강조되고 있다. 더군다나 국가는 그러한 성평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책무마저 규정되고 있다. 이 2개의 헌법 규정이 문구 대로만 현실에서 실현된다면, 일터에서도 삶터에서도 그리고 가정에서도 성불평등은 없을 터이다. 


성평등에 대한 규정은 비단 현행 헌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48년의 제헌헌법에도 유사한 규정이 있다. 제헌헌법 제8조는 분명하게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법 앞의 평등을 제외하면 현행 헌법과 동일하다. 그리고 제20조는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여기서의 남녀동권이란 남자와 여자가 사회적·법률적으로 성에 따라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므로, 혼인의 내용들은 성평등에 입각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현행 헌법과 비교하자면 가족생활에 있어서의 성평등에 대한 거론이 없다는 점에서 다소 아쉽다.



성평등에 대한 헌법적 규정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평등임”이라고 규정하여 남녀평등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제5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유함”이라고 규정했던 바,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이 여성 참정권은 시대를 앞서나간 것이었다. 1919년 당시, 1894년에 여성의 투표권을 최초로 인정한 뉴질랜드, 1902년의 호주, 1906년의 핀란드 정도만이 여성에게 완전한 보통선거를 허락하고 있었다.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6년이 되어서야 여성의 참정권이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비춰보면 1919년 임시헌장이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규정한 것은 대단히 앞서가는 것이었다.


헌법 수준에서의 성평등과 남녀차별 금지에 대한 내용들은 이렇듯 진작에 공식적으로 규정되고 선포되었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실은 이러한 헌법적 규정들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성불평등은 일상적인 것이기에 그 거리는 더욱 멀어 보인다. 


2021년을 기준으로, 경제활동 참가율은 남성과 여성이 각각 72.6%와 53.3%이며, 고용률은 각각 70.0%와 51.2%이다. 서로의 격차가 무려 20%에 이른다. 남성임금 대비 여성임금의 수준은 시간당 임금으로 봤을 때 69.8%로, 여성이 30%가량 임금을 덜 받고 있다. 육아를 목적으로 한 비경제활동인구의 98%가 여성이다. 임원에 있어서의 성별 격차도 심각하다. 1천명 미만 공공기관, 지방공사 및 지방공단, 민간기업의 경우 여성임원의 비율은 각각 7.1, 0.5, 10.3%이다. 1천명 이상의 경우에는 각각 4.4, 3.7, 11.5%이다. 4급 이상 일반직 국가공무원 중 여성비율은 19.7%에 그친다.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지 간에, 고위직에서의 여성비율은 매우 낮아 성불평등이 심하다. 이런 현실은 헌법정신과 헌법의 규정들에 들어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헌법과 현실에서의 관행이나 실천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있는 것일까? 왜 헌법이 규정들이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헌법의 내용은 법률과 정책을 통해 구체화된다. 물론 헌법 규정 자체는 분명히 법적 구속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세한 사안에 들어가면 헌법 보다는 관련 법률 규정이 있고 없음을 따진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버젓이 헌법이 성평등을 규정하고 있음에서 구체적인 법률들이 없다는 핑계로 국가는 발을 뺀다. 결국 성평등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규정하는 법률과 정책이라는 다리가 없으면 헌법과 관행·실천은 연결되기 어렵다. 


문제는 법률과 정책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성불평등의 환경에 매우 강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법률과 정책은 주로 정치인들과 고위공무원들이 담당한다. 헌법을 현실에 적용하는 다리를 놓는 주체들은 다름 아닌 대통령,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등인 것이다. 이 주체들이 헌법이 규정하는 성평등 원칙을 자신들의 정치활동을 통해 만들어내는 법률과 정책에 녹여낸다. 특히 민주주의가 보다 잘 구축된 사회에서는 이러한 정치활동이 더욱 활발히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러한 활동이 너무나 소극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소극성의 가장 큰 책임은 아마도 앞서 말한 주체들 중에 성평등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었다는 점에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런 활동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입법활동과 예산심의활동 그리고 더 나아가 지방자치활동에 여성이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남성이 해당 활동들을 하면서 성평등의 입장에서 많은 것들을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여성의 권리들을 신장함에 있어서는 보다 적극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상식이다. 즉 여성이 정치과정을 구성하는 자리들 중 일정 수준 이상을 차지하여 실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한 법률, 제도, 정책을 만들어내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의 여성비율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의 여성비율 그리고 중앙정부고위직의 여성 비율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바로 이 비율이 매우 낮아서 문제이다. 제21대 국회의 여성의원은 비례대표의원 24명, 지역구의원 29명 등으로 비율상 19%에 지나지 않는다. 이 수치는 국제의회연맹 기준 세계 190개국 중 121위이자 전 세계 평균 여성의원 비율인 25.6%(2021년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지역정치로 넘어가면 남녀격차는 더 심하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여성 후보 공천율은 매우 낮고 역대 광역자치단체장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으며, 기초자치단체장의 여성 비율도 3.5%에 불과하다. 


이러한 여성의 심각한 과소대표가 성평등적 관점이 법률과 정책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성평등한 사회로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정치대표성의 양성 간의 균형을 위한 제도 검토와 개선이 요구된다. 당연히 개선의 방향은 여성 대표성의 현격한 강화이다.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헌법 따로 법률 따로 관행 및 관습 따로’인 사회이다. 헌법에는 분명히 성평등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헌법정신과 헌법 규정들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법률과 정책은 미약하다. 따라서 여성의 정치과정에의 실질적인 영향력과 결정권을 보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평등적 법률과 정책을 선도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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