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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께살기연구소 May 28. 2023

왜, 무엇을 위해 우리 정치는 이기는 것에 목을 메는가

적대적 공존, 승리이데올로기, 그리고 정치적 도덕성

갈등과 투쟁은 본성적이고 본래적이다       

             

갈등과 투쟁은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원래부터 인간에게 부착된 것이라 할 만 하다. 인간은 다양한 욕망과 욕구를 갖고 있으며 각자가 처한 환경도 다양하기에 당면한 필요들도 당연히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성은 서로간에 갈등을 낳으며 갈등국면에서 자기의 것을 지키는 투쟁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2019년, 광화문에서는 문재인 대통령 규탄, 서초동에서는 조국 전장관 수호를 위한 집회가 열렸다. 이미지 출처: 월간중앙, https://jmagazine.joins.com/mo

뿐만 아니라, 세상이 조금 더 나아기지 위해서는 문제들이 외부로 드러나야 하며, 그래야 해당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토론과 논쟁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질 기회가 생겨난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효과가 있음에도, 갈등과 투쟁은 사회의 구성원을 억압하고 한쪽으로 몰아가는 왜곡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한 부정적 작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적대적 공존’이라는  암묵적이고도 비공식적인 시스템이다.



갈등의 부정적이고 왜곡된 모습, 적대적 공존(敵對的 共存)


많은 전문가와 논자들이 현재 우리나라 정치계의 가장 부정적인 관행들 중 하나가 거대 양당 사이에 체결된 ‘적대적 공존’이라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를 병들게 하는 이 암적 체계는 집단 정체성을 강조하는 두 진영이 서로가 상대방을 적으로 상정하고 강하게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각 진영의 지배 그룹들은 상대에 대한 적대를 자기생존의 유지와 확장을 도모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동맹체계이다. 이 동맹은 외부에 은폐되어 있으며 상호간에 암묵적으로 체결된다. 그 결과, 각 지배그룹은 상대 진영의 지배그룹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그의 지배가 지속되는 데에 일종의 공모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암묵적인 주고 받음은 결국 상호 공존으로 귀결된다.


이미지 출처: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0905261807285

적대적 공존은 최소한 3가지의 규칙을 갖고 있다. 첫째, 상대방을 적으로 상정하고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정무적 판단이라는 미명하에, 대부분의 전략과 전술들은 상대방의 잘못을 찾아내고 부각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우대를 받는 인물들은 이런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 맥락에서는 국민에게 시급하고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고민은 후순위가 되며,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다.


둘째, 각 진영은 적으로 표상된 상대방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당화한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낫다거나 자신이 상대방보다 덜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지를 이끌어내려 한다. 정치인, 정치조직, 정치세력 등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그들이 하는 일이 국민다수에게 얼마나 이로운 것인가, 국민의 삶을 얼마나 나아지게 만드는가 등이어야 한다. 즉 국민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적대적 공존이란 체계에서는 국민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차이가 기준으로 작동한다.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셋째, 각 진영의 지배 그룹은 상대방에 대한 적대를 통해 내부를 통제하고 현재와 미래의 정적을 억압한다. 상대방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은 자신의 진영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과장되며, 내부의 개혁을 위한 목소리는 싸움에서 상대방에게 이롭다는 이유로 억압된다. 똘똘 뭉쳐 있어도 적을 섬멸할 수 있을 지 모르는 형국에 내부 개혁은 분열을 만들며 이는 결국 상대에게 이로운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리고 자신의 진영 내에 경쟁하는 세력이 발생한다면 이들을 제거하는 방법이 경쟁세력이 적에게 이로운 행위, 즉 이적행위를 한다고 누명을 씌우거나 확대해석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적을 섬멸해야 하므로 당장의 고통을 감내하라고 강요한다. 당장의 고통을 토로하고 전면화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적에게 이로운 것(적이 우리 진영의 좋지 못한 상황을 이용하여 선전할 것)이므로 이를 최대한 피하거나 미루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러한 요구들을 비판하고 비난한다. 이러한 행위와 판단의 규칙은 결국에는 지배 그룹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내부를 통제하는 최고의 방법과 수단이 된다. 


이러한 ‘적대적 공존’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정치계가 긍정적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사회의 발전방향과 대안들이 만들어내고 토론과 논의를 통한 새로운 총의(consensus)의 형성을 이끌어낸다. ‘적대적 공존’은 바로 이러한 민주적 과정이 들어설 공간을 없애버린다. 기존의 지배 그룹에 줄을 서고 그들의 관행을 따라하며 그들의 인식판단틀을 받아들여 기존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만이 가능한 선택지로 올려 놓을 뿐이다.


승리 이데올로기: ‘이기는 것이 정의, 민주당이 이기는 것이 정의이다’


‘적대적 공존’체계를 작동시키는 원칙들은 정치인이나 정당의 행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 작게는 이슈가 되는 사안에 한정되기도 하지만, 크게는 한 정치세력의 방향성과 그것을 위한 전략과 전술의 패키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민주당에서 회자되는 ‘이기는 민주당’이 대표적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기는민주당 Again 포스터

최근 민주당은 ‘이기는 민주당 Again’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순회 아카데미를 하고 있다. 토크 형식을 빌린 아카데미여서 주로 현안이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오가는 내용들은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과 민주당이 다가오는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 해당 현안들에 대해 대응해야 하는지 등이다.  물론 총선이 1년이 채 남지 않은 지금, 총선승리를 위해 ‘이기는 민주당’이라는 슬로건은 이해할 만 하다. 다만 이미 지난 대선에서 이 슬로건은 이미 사용되었고, 결과는 패배였다는 점이 제대로 반영되지는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승리를 강조한다는 것은 정치행태를 분석함에 있어서 함의하는 바가 많다. 특히 ‘적대적 공존’이라는 토대를 고려한다면, 부정적 해석의 여지가 매우 커진다. 승리를 말하는 것은 우선 싸움의 상대방 즉 적이 상정돼야 하고 현재는 전투 중이라는 상황도 전제돼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겨야 하기에’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할 지가 핵심이 될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수단과 방법이 목적을 삼켜버리는 것으로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다. 승리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생존, 즉 민주당의 생존이다. 최근에 자주 인용되는 ‘민주당이 이기는 것이 정의이다’라는 문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상대인 국민의힘이나 현 윤석열정부는 정의가 아니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명확하게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승리의 목적이 국민다수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든지, 국민의 행복을 높이기 위함이다 등이 상정돼야 그 기준에 맞춰 정의와 부정의를 판가름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의 행태는 일면 ‘민주당이기에 정의이다’라는 의미가 깔려 있을 뿐 정확히 어떠한 사회, 어떠한 공동체, 어떠한 방향성과 가치들을 추구하기 위해 승리하겠다는 말들이 없다.


승리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도덕성의 위기


승리이데올로기는 정치영역에서의 도덕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정치의 도덕성은 우선 정치행위와 통치행위에 대한 책임윤리가 포함된다. 특정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 행한 결정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정책실패가 있었다면 무엇이 실패를 인정하고 무엇인 문제였는지를 파악하여 다음 기회에 해당 내용을 정책수립에 반영해야 한다. 당연히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SBS뉴스 캡쳐.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197664

도덕성의 다른 측면은 정당성의 획득이나 권위의 획득에 있다. 정치영역이나 정치행위들은 최대한 투명하고 공개적이어야 한다. 모든 정치과정들은 사회구성원에게 개방되어야 하며 사회구성원들은 모든 정보에 대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에서의 도덕성은 바로 이러한 투명성, 공개성, 개방성 접근용이성 등이 확보되는 것을 말하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권력은 사회구성원들에게 폭력이 아닌 권위의 위명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정치도덕성이 확보되면 그 결과로 정치가 만들어내는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도덕적인 환경과 과정이 있었기에 그 결과물도 도덕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승리에 대한 집착이나 지나친 강조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도덕성에 대한 경시로 연결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현재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을 철저하게 섬멸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면서 모든 가능한 방향에서 공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이러한 싸움의 시작이 비단 윤석열정부일리 만무하다. 이미 민주당도 15년의 수권 경험이 있고 이 기간에 싸움의 구도 또는 전쟁의 구도를 짜고 이 안에서 상대에 대한 공격을 한 바가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면, 국민의힘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군부정권과 민정당 등이 민주당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 요컨대, 정치장에서의 갈등은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싸움의 분위기에서 모든 정치세력들이 ‘이기기’ 위해 생각하고 움직이며 상대방을 쓸어버릴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정말로 상대를 없앴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질까? 현재의 인물들이 없어진다고 해서 달라질까? 사실 정작 달라져야 할 것은 정책, 제도, 관행 등이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 자체가 아니다. 물론 사람이 정책, 제도, 관행을 만들기 때문에 사람이 바뀌면 그것들도 바뀔 것이라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정책, 제도, 관행은 실제로 교체된 사람들이 해당 내용을 바꿔야 실제로 바뀌는 것이지 인물교체 자체가 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쓸려 나가도 정작 정책, 제도, 관행, 그리고 지배적인 인식판단틀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단순히 사람만 교체될 뿐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정치적 도덕성은 여전히 그리고 미래에도 강력한 무기이다


‘이기는 민주당’의 논리는 자칫 잘못하면 ‘도덕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힘과 다른 것 중에 하나가 도덕적 우월이라 말한다. 이 주장이 참인지의 여부는 긴 논쟁이 필요하니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자(개인적으로는 거짓이라 판단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더불어민주당은 무엇으로 국민의힘과 차별화할 것인가이다.


발자크의 소설 ‘잃어버린 환상’은 19세기 프랑스사회의 도덕성 상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오노레 드 발자크 ⓒ게티이미지뱅크

정운영에 대한 능력, 소위 ‘통치할 수   있음(governability)’은 수권을 위해서는 어느 당이나 갖추어야 하는 것이기에 차별의 기준이   되기 어렵다. 이기는 능력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공히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도덕성은 다르다. 이   기준은 모든 정치세력이 수용하는 것도 아니고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동일한 상황이라며, 정치적 도덕성을 더 갖추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기는 첩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치적 도덕성이 수권역량이나 이기는 능력을 줄인다는 주장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의 청렴도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안들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미약한 것들이다. 그리고 정치적 도덕성의 내용들, 즉 개방성, 투명성, 접근용이성도 우리나라보다 높다. 즉 정치적 도덕성이 수권역량이나 승리역량에 하등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도덕성은 사회구성원의 신뢰를 창출할 수 있어 수권과 승리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더불어민주당이 도덕성을 경시하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독이 될 여지가 더 크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은 도덕적이어서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것도 아니다. 정권을 잡았을 때 상대방을 제대로 때려잡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도 아니다. 실행하고자 하는 정책이나 구축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이다. 정책과 패러다임이 국민의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바가 많았고, 따라서 국민의 삶의 질과 삶의 여건들을 향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은 국민의힘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민주당의 정권으로 교체되는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적대적 공존’과 ‘승리이데올로기’는 바로 국민의 요구, 국민의 삶, 국민의 삶의 토대들과는 유리된 것이기 때문에 정권교체가 발생한 것이다. 상대방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에서의 싸움은 상대방을 기준으로 삼아 치뤄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기준점으로 삼고 상대방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세력들은 바로 이 간단한 이치를 망각하고 자기들끼리 치고 박는 3류 코미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국민이라는 중심으로 돌아가야 될 때이고, 정치적 도덕성 또한 국민의 시각으로 재구성되어 정치적 장에 새롭게 칠해져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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