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 비 갬

빗물 속에 해가 있네

by 릴리에

여름의 끝자락에 명복공원에서 아이가 물었다.

엄마, 화장이 뭐야?

장은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낸다는 뜻이고 화는 불 화.. 그때 불처럼 뜨거운 것이 목 위로 올라왔다. 입 밖으로 내면 곧 말처럼 될 것만 같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조차 말로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재가 된다고, 결국엔. 이제 이 모든 것을 알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앎이 사무치게 아팠다.


왜 몰랐을까. 세상의 수많은 암환자들이 방송에 나와 그 고통과 절망과 눈물을 호소할 때에도 내 가족에게서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극한의 고통과 인내의 극단과 육신의 민낯을 알지 못했다. 오래전 아직 인생이 반짝반짝하던 시절에 이상문학상 수상작이었던 김훈 작가의 단편(화장, 2004)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소설이 묘사하는 죽음과 고통의 벌거벗은 민낯이 너무도 메마르게 사실적이어서 책을 읽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였지만, 숙연하게 아름다운 글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해야 하는지 고인의 생전 생일에 그의 인생을 회고하고 추억해야 할지. 산 자의 세계에선 돌아가신 날을 마지막이라 느끼겠지만 사후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생을 떠나 저 생에서 새로 시작하는 1일 그렇게 의미를 두어야 하는 건지. 아는 것이 이렇게도 없다지만 우리가 인생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며 함부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다만 너무도 갑자기 허망하게 죽음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이별. 어렸을 땐 이 말이 로맨스를 먼저 떠올리게 했지만, 나이가 들어 이 두 글자를 직시하여 볼 수 있는 용기는 이제 없다.


작가님의 글을 못 본 지 무려.. ..
작가님 글이 그립네요


브런치가 어느 날 알려 왔다. 이렇게 알려준 그대는 AI 일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별이 문 앞으로 발끝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던 무렵엔 도저히 글쓰기는 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생각은 끊임없이 솟구치듯 많았던 이상한 경험을 했다. 목적이 조금씩 다른 몇 가지 채널들을 이용하고 있는데 끊임없이 포스팅을 하고 생각의 단상들을 기록하곤 했다. 다만 기록이 글이 되진 못했던 것 같다. 다가오는 이별과의 싸움이 그땐 끝나지 않았었고 어떻게 그것을 이해해야 할지 그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싸워 나갈 뿐, 그저 기도할 뿐.


연로하시고 지병이 많으신 부모님과의 이별이 올지도 모를 미래의 어느 날을, 살다가 문득문득 어느 날 갑자기 두렵게 상상해본 적은 있었지만 오히려 뜻밖의 곳에서 이별은 황망하게 찾아왔다.


모든 문학과 예술의 근원은 인생에 끝이 있다는 존재론적인 성찰 혹은 철학이나 종교를 떠나 죽음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에 있다. 우리는 다 안다, 우리 모두가 죽을 거란 사실을. 두렵고 소름 끼치게 잘 안다. 습득한 것이 아닌 본태적인 지식으로 안다. 지식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경험으로는 처음 겪어보는 일은 사고와 감정과 인지의 마비를 가져왔다. 현실감이 없는 상태라고 해야 할지. 슬픈데 웃을 수 있고 괴롭지만 밥도 맛있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슬픔 속에서도 거리의 햇빛은 너무도 뜨겁게 생생했던, 기록에 남을 이 여름의 폭염이 간다. 기상 예보관을 당황하게 할 정도로 절기를 무시하고 다시 찾아온 장맛비를 보면서 어머니는 떠난 이의 눈물이라 했다.


이십 대에 보았던 어느 영화에서였던가, 삶은 계속된다고(21그램, 2004). 순전히 기억에만 의지해서 영화의 장면을 복원해 본다면,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 앞에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딸: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어떻게 우리와 놀아주실 수 있었죠.
아버지: 삶은 계속되는 거란다.


팬데믹은 계속되고 백신 접종이 연기되었다는 통보가 어느 날 오고 코로나 걸려 죽기는 싫은데 직장에 눈치 보는 건 죽기보다 더 싫으니 백신 휴가를 포기하고 이딴 접종도 다 내던지고 싶고.. 이렇게 삶은 계속되기에 글쓰기도 어쩌면.


왜 이렇게 계속 써대는 걸까, 무엇을 이해하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