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me to Keep
이 글의 소제목 A time to keep 문구는 본래 전도서의 한 구절로, 미국 작가인 타샤 튜더(Tasha Tudor 극작가, 삽화가, 1915-2008)의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원작을 보면 그녀는 킹 제임스 버전의 성경에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인생의 모든 일에도 계절처럼 섭리와 때가 있으니,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켜내고 싶은 날들이 있다는 의미를 담은 A time to keep. 타샤는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계절마다 절기마다 자연을 누리며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감동적인 글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장면 곳곳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웰시 코기들이 정겨움을 더해준다. 웰시 코기를 너무 사랑했던 탸샤는 코기들이 사는 마을인 코기 빌(Corgiville) 시리즈를 창작하기도 했다.
솔로몬의 작품으로 알려진 전도서 원작에서 시인은 운을 맞춰 짝을 이룬 구절들로 인생을 인도하시는 신의 섭리를 아름답게 표현했다.
A time to get, and a time to lose
a time to keep, and a time to cast away
Ecclesiastes 3:6 [KJV]
타샤의 작품에선 계절처럼 돌아오는 우리 인생에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누리고 기억해야 할 시간들을 자연의 섭리를 담은 절기와 인생의 즐거운 한 때를 통해 보여준다.
타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고 원작인 전도서에 나타난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보던 중에, 삶은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허락된 나날들’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떠올라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가진 탸샤의 작품은 미국에서 출간된 초판본으로 한국에선 <타샤의 계절>(윌북, 2018)로 출간되었다.
삽화를 그리고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타샤 튜더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놀라움과 동경과 교훈을 주었다. 그녀에게 내 삶을 비춰볼 때 겨우 찾아낸 공통점이라면, 늙은 고양이를 키우고 티타임 좋아한다는 정도, 사실 나도 타샤 할머니의 오래된 찻잔과 낭만적인 드레스를 좋아하는데 나도 여러 가지를 수집하지만 이 분야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사과나무를 키워서 직접 만든 나무 주스 틀에 짜서 사과주스를 만드시는 타샤 할머니의 삶은 누군가에겐 동경의 대상이다. 가끔 재활용 분류를 한다고 집안의 온갖 쓰레기를 모아 펼쳐놓고 비닐을 한 장 한 장 닦아 뜯어 펼치고 종이팩을 평면 전개도에 따라 곱게 펼쳐주는 그 단순하면서 집중력 높은 작업에 희열 같은걸 느낀 적이 있다. 즐겁고 보람되고 생산적인 것들을 건강하다고 부른다. 아이 챙기고 출퇴근과 가사노동 사이를 초조하게 오고 가며 살아가는 풀타임 노동자인 내 삶에도 언젠가 은퇴(명퇴가 될지 사퇴가 될지)라는 이름의 하프타임은 올 거라고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산다.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타샤 할머니로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데.
누군들 쉬울까 싶지만 직장생활의 가장 큰 위기는 육아 독립군으로 살았던 아이 어릴 적 무렵이었는데, 현재도 독립군이 해방을 이루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만 브런치 쓸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는 뜻. 내 경우엔 휴직을 하고 또 하고 계속 또 또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출처: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광규 옮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에서, 한마당, 2014
다니지는 못하고 유지만 하고 있으니 이름만 직장인 무늬만 직장인. 사실 쉬는 동안 그만둘 생각을 많이 했었다. 휴직 중에 사직을 생각하고 휴직원을 쓰며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동안 아이는 훌쩍 자랐고 내 나이의 앞자리 값이 바뀌었으니 조직사회에서 내 좌표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인데 생태계를 위협하는 교란세력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조심하자. 내편인 남편은 내가 직장 관두고 장사할 거라고 뻔한 월급쟁이 카페 창업 레퍼토리를 꺼낼 때마다, 뭘 팔아서 먹고 살 생각 말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사고 싶은 걸 한 개씩 사는 게 더 낫다는 급진적인 이론으로 접근했다. 덕분에 컬렉션이 생겼다는 그런 이야기. 오래되고 예쁜 물건을 좋아한다 했더니 엄마는 고물 좋아하는 거라고 아이가 알려주었다.
고물. 오래된 물건이 인고해 낸 시간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인간만이 시간 속의 유한한 존재라는 반대 증거. 사람은 가고 물건은 남는다.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다고 했다. 우리의 오늘은 누군가에겐 갖지 못한 내일이었다. 누구나 고인이 된다. 옛사람, 옛 추억. 옛 일이 될 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전도서 1:2 중에서).
솔로몬의 전도서는 아름다운 문학작품이기도 해서 신앙 여부를 떠나 인생의 깊은 통찰을 준다.
요즘 즐겨보는 도라에몽 애니는 원작 만화까지 생각해보면 역사가 오랜 작품이다. 우리 집에선 어른 아이 함께 보는 프로그램이다. 최근 시즌의 주인공 캐릭터가 미묘하게 행동이나 성격 면에서 이전 시즌과 달라진 것 같다고 캐치할 정도로 아이는 이 만화에 몰입해 있다. 17기에서는 이슬이가 좀 이상하다, 도라에몽이 좀 달라졌다는 식의 비판적 시청이 가능할 정도로 아이는 이 만화의 세계관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도라에몽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비급 같은 신통한 물건들 중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요소는 시간여행이라는 주제와 연결된 에피소드 들이다. 미래의 중년이 된 진구가 현재로 시간여행을 와서 그리운 엄마 잔소리를 들으며 눈물 흘린다는 삽화. 술에 취한 아빠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소환하는 이야기. 엔딩 ost 에선 잔물결 같고 봄바람 같은 일본 가수의 목소리가 마음을 움직인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멀지 않은 곳에 살다 보니 아이도 어려서부터 윤동주를 안다. 작은 문학관이 그곳에 있는데, 청년 윤동주가 읽고 소장했던 책들과 ‘동주’ 이름이 적힌 손글씨들을 가만 보고 있으면 뭉클함이 크게 온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4). 동주의 유품(성경)을 보면 그도 어쩌면 이 구절을 읽었을지 모르겠다.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이름자를 묻으며 오는 봄을 그려보는 시인의 모습에서 그렇다(별 헤는 밤). 시인의 예지력이었는지 시대의 아픔 탓이었는지 자신의 시에서 이름자를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들었던 시인은 꽃같이 져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을 바라보던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가을의 길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