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0km
그날은 햇볕이 말랑하고 바람은 다정한 날이었다. 이상기온으로 한겨울인 1월 중에 따스해진 바람에 엉덩이가 근질해져 밖을 나왔더랬다. 여상히 고관절을 열심히 풀어주고 호흡을 내뱉으며 발을 굴렀다. 온 우주가 내 발밑을 받쳐주는 것 같은 그런 날, 달릴 때 느껴본 적 있는가?
나는 겨울이 너무 싫다. 영하가 찾아오는 겨울이 되면 몸이 자꾸 움츠러든다. 계속해서 느릿해지는 몸동작에 생각도 느려지고 게을러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겨울이 싫다. 그래서 이따금 '겨울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한없이 추워지는 날에는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어진다. 하지만 그토록 겨울을 싫어하는 만큼 나는 봄이 찾아오는 그 순간을 정말 좋아한다. 날카롭고 따가운 겨울바람이 물렁해지는 순간은, 정말 한없이 달콤하게 다가온다.
어김없이 봄을 그리워하며 보내던 1월. 갑자기 이상기온이 찾아왔다. 날카로운 겨울바람의 기세 위에 해가 쨍쨍 히 내리쬈다. 갑자기 낮 기온이 10도에 육박했던 그날은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봄의 향기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이런 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나는 당장 러닝화를 찾아 신고 나갈 준비를 했다. 자고로 그토록 사랑하는 무언가를 제대로 즐기려면 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법이라 하였다. 스트레칭을 해주고 항상 뛰던 안양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땅을 박찼다.
겨우내 느꼈던 볼이 에이는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달릴수록 몸이 더욱 더워져 옷을 한 꺼풀 벗으니 햇살이 더욱 잘 느껴졌다. 봄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즐거움에 붕 뜨는 몸이 발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줬고 나는 신나게 웃으며 발을 박찼다.
1km. 2km, … 10km 돌파! 평상시 돌아가던 리턴지점을 지나쳐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길로 더 달려 보았다. 새로운 길이었다. 더 나아가본 그 길에는 좀 더 풀이 무성했고 인적이 드물었다. 이왕 홀로 뛰는 거 누가 내 얼굴을 보겠냐며, 마치 숲 속 타잔이 된 기분을 느끼며 신난 웃음이 얼굴에 걸었다. 혹시라도 날 지나쳐 가는 사람은 아마 뛰다가 미친 광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맞은편에서 뛰어오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그 길을 지나 한강이 점차 가까워지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달리는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다. 내가 앞서가는 이들보다 나를 앞서가는 이들이 더 많았다. 슝하고 달려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더욱 동기부여가 되어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들어 주었다.
신나게 뛰는 심장에서 도파민이 팡팡 터져 나오는 것도 잠시. '아차차, 나 이 길을 다시 뛰어가야 하는구나..!' 큰일 났다. 생각보다 너무 먼 거리를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이성이 돌아오니 한없이 가벼웠던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큰일이었다.
하지만 병아리라도 러너 가오가 있지 걸어가는 건 죽어도 싫었다. 버스는 더더욱 싫었다.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오늘 온 우주가 내가 뛰는 걸 도와주는데, 이거 하나 못 뛰겠냐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자리에 멈춰서 심호흡을 했다.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해줬다. 조금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씩 왼쪽 골반이 아파왔지만 천천히 뛰면서 다리를 풀어준다고 스스로를 달래 보았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는 3km마다 멈춰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다시 뛰고 멈췄다 뛰기를 반복하며 도착지점에 가까워지니 워치에서는 '16km'라는 알람이 들렸다. 어찌나 뿌듯하던지.
스스로가 너무 기특했다. 물론 발바닥에 불이 난 것 같긴 했지만, 뜨거운 모래사장을 밟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왼쪽 골반이 욱신거려 집에 절뚝거리며 가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무식하게 뛰다니. 다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골반의 통증을 생각하면 정말 다칠 위험이 높은 일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사전 연습도 없이 뛰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뭐랄까, 정말 단순한 즐거움만으로 한계를 돌파한 기분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충만감이었다.
보통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반드시 정답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이 날 깨달았다. 확실히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고자 노력하는 것보다는 즐기면서 해내는 게 더 큰 쾌감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고. 역시 뛰는 건 재밌다. 생각보다 나, 아주 잘 즐기고 있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