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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Dec 19. 2022

내일은 쓸모없게 살아보려고 해.

효용론적 관점 그리고

문학 작품을 읽은 후에는 내재적 관점과 더불어 외재적 관점에서의 감상을 설명하곤 한다. 특히 수능 문제에서는 작품을 주고 <보기>와 관련한 감상으로 적절한 것을 추려내는 문제가 출제되니 말이다. 따라서 <보기>가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 작가의 생애와 관련된 것인지, 독자와 관련된 것인지에 따라 각각 반영론적 관점, 표현론적 관점, 효용론적 관점을 판단하여 올바른 답을 추려내야만 한다.

 



효용效用이란 본받을 효, 쓸 용이라는 단어이다. 즉, 보람 있게 쓰거나 널리 쓰인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고 독자는 대개 자신의 삶과 관련해 비판적으로 작품을 수용하는 것은 익숙하다. 우리는 이전부터 교과서를 통해 비판적으로 감상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 역시 특정 작품을 감상하고, 내재적, 외재적 관점에서 그것들을 다시 한번 되뇌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오랜 시간 수록되고 널리 알려지는 작품에는 그만한 가치와 더불어 전달하는 메시지의 무게가 있을 테니 말이다. 문득 '문학 작품'이라는 주체를 '나'로 바꾸어 보았다. 효용론적 관점에서 감상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릴 적부터 부단히 공부를 하라는 말을 듣지도, 그렇다고 하고 싶은 것을 빨리 찾으라는 말을 듣고 자라지는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부모님께서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해 볼 수 있도록 한 발 물러나 자라나는 나를 지켜봐 주신 것 같다. 그 안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국가들을 여행하기도 했고, 여러 분야의 아르바이트도 해 보았다. 나아가 돈을 벌기 위해 다양한 직업을 갖춰보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마음이 예쁜 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워낙 말의 무게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말은 내뱉고 싶어 하지 않는 성향이나, 나의 작은 말에 용기를 얻어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고, 보듬을 줄 아는 어린이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칭찬’과 격려'를 하려고 노력하는 요즘이다. 그러다 보면 문득 어린 시절이 스쳐갈 때가 있는데, 학교에서 상장을 받거나 받아쓰기 시험을 100점 맞은 날에는 꼭 시험지를 부모님께 가져다 보여드렸던 기억이 나곤 한다. 나에게 눈을 맞춰 주는 순간 무언가 모를 우쭐한 느낌이 들어, 그 감정을 자주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생 때는 시험 문제를 하나만 틀려도 엉엉 울곤 했다. 무어 그리 슬펐던 것도 없었을 텐데 아쉬움을 눈물로 대신했던 것 같다. 만약 시험 점수가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의 기분과 관련된 문제이지, 부모님의 기분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생각을 조금 더 일찍 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께서는 시험 점수에 대해 한 번도 나를 꾸중한 적은 없지만 스스로 부모님을 더욱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만점이 아닌 점수는 괜스레 아쉽고 서글펐으며, 점수가 깎이는 날에는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사동의 주체도 없었지만 나는 무언가 물질적인 것으로 나의 내면을 채우는 게 익숙했다. 학생의 신분으로 편리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점수였고, 높게 받아야만 나의 효용이 생성되는 것만 같았다.


성인이 되어 점수라는 서글픔에서 벗어난지는 오래되었지만, 스스로의 효용에서의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루이지만 작은 성취감이라도, 무언가 물질적으로 생성되는 날에는 하루의 뿌듯함에 도취되곤 한다. 그러나 스스로가 의미 있게 사용되지 못했거나 보람 있는 하루를 보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날에는 무기력하고 걷잡을 수 없는 씁쓸함과 공허함에 사로 잡히곤 한다. 아쉽게도 후자의 날이 더욱 많은 나이기 때문에 오늘 타자에 올라 있는 나의 손이 더욱 바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말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어요."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대하지 않으면 그 누가 나를 가치 있게 대해주겠어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라고 말이다.

나는 자기 연민이 참으로 많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자기 연민의 정의를 찾아보니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지 않던 상황, 실수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비판하는 것보다 보듬는 것을 우선시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연민에는 익숙했지만, 내포되어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실천하기란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진다. 빙 두르지 않고 명확하게 말하자면 '존재 만으로 소중하다.'는 의미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날이 '자신을 발전시키고 생산적인 것들을 이루어 내는 것이야 말로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고, 그것이 인정받을 때야 비로소 하루의 노을이 완벽하게 저물어 간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여전히 보람되고 쓸모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지만, 충족되지 않는 삶에서 느끼는 박탈감이 강하게 박힐 때가 많기 때문에 생각의 회로를 돌려보려고 한다. 언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어린아이 보고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이효리의 답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냥 아무나 돼"

별거 아닌 여섯 글자의 조합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무척이나 많은 뜻이 담겨 있음을 이제야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감기만 걸려도 신문에 회자되는 슈퍼스타의 삶을 살았던 인생에서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녹록지는 않았겠다.


내일 나의 목표는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보람 없이 보내는 하루가 쌓이다 보면 조금씩 효용 없이 살아가는 나의 하루에 내성이 생길 테니 말이다. 나의 효용적인 가치를 보지 않고,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온 마음을 다해주는 반려견 보다야 못하겠지만, 또한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친구의 발끝만이라도 따라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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