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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Dec 14. 2022

“단무지가 제일 맛있다!”

분수의 새로운 정의

동음이의어 즉, 소리는 같고 의미가 다른 단어를 말하는 동형어를 가르칠 때 아이들에게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분수’라는 단어를 이용해 작문을 하는 시간이었는데 대다수의 아이들은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사람으로서 이를 수 있는 한계'라는 뜻을 이해하기를 어려워했다. 이 보다는 '물을 세차게 위로 내뿜을 수 있도록 만든 설비'라는 뜻을 익숙해했고, 막힘없이 작문을 해 나갔다. 혹은 수학에서 배우는 분수이거나.




나는 옛 선인들의 시조를 가져와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삶을 지향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부가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나는 '분수'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는다. 자신의 신분에 맞는 한도라는 말이 거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였다. 여기서 '신분'은 사회적인 위치나 계급인데 결코 이 역시 좋게 들리진 않는다. 난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분수에 따라 마음가짐과 행동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분수에 맞게 행동하라.’ 이 말은 오히려 자신의 한도 혹은 한계를 철저하게 깨닫고 고려해, 상황에 맞게 늘 겸손함을 미덕으로 살아가라는 이질적인 현대판 신분제도처럼 느껴졌다.


나와 음식 궁합이 잘 맞아 종종 먹고 싶을 것을 정해 함께 식당을 찾는 친구가 한 명 있다. 둘 다 회와 초밥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취향이었기에 처음으로 연말을 맞아 공덕에 위치한 오마카세를 예약했다. 그곳은 1회 식사를 하는데 약 5만 원에서 10만 원의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연말이면 예약이 늘 꽉 차 있어서 기회조차 잡지 못했던 곳이었다. 운이 좋게 예약을 하고, 당일이 되어 인기가 좋은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씩 정성스레 준비되는 초밥을 바로 앞에서 전달해 먹으니 맛도 느낌도 새로웠다. 워낙 회를 좋아하는 우리였지만 그 맛은 더욱 황홀했다. 다만 모든 손님들과 가까이 앉아 있는 탓에 말보다는 눈으로 감동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식사를 마치고 문 밖을 나서며 우리는 다음번에는 꼭 룸으로 예약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황홀한 음식을 맛보면서도 바 테이블은 우리의 스타일이 아니라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셰프님과 대면하면서 음식에 대한 소개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넣는 행위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그런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아주 좋은 식당을 다녀와서도 집 밥이 최고로 맛있다고 느꼈던 적, 혹은 아주 맛있는 코스 요리를 먹으면서도 부가적으로 나오는 단무지가 가장 맛있었다고 외쳤던 적 말이다. 비싼 요리를 먹으면서도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란 90%가 자신의 니즈에 맞게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어도 10%의 불편함이 느껴지면 그것에 더 큰 비중을 두어 몰두하게 된다고 한다. 심리적으로 이익보다 상실을 더욱 크게 느끼는 것도 이러한 연유겠다. 단편적으로 난 오마카세와 잘 맞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 같다. 90%라는 맛의 황홀함이 10% 공간의 불편함으로 인해 아쉬웠고 그저 "단무지가 제일 맛있더라!"라는 볼멘소리로 대체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서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 맛에 감동하는 순간을 즐기는 타입이다. 서로 식궁합도 잘 맞기 때문에 상대가 음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그 맛이 배가 되곤 한다. 그러나 협소한 공간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즐겨야만 했던 오마카세는 나와는 나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듯한, 혹 좀처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분수를 그렇게 정의하고 싶다. 이 말에는 사리 분별이 가능할 것, 처지와 상황 판단을 할 것 등과 같은 많은 전제 조건이 내포되어 있으니 그보다도 전에 내가 '내켜하는 것'으로 말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들은 내가 마음속으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들이고, 분수에 맞다는 것은 내 마음이 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새로운 수확에 만족할 수 있겠다. 분수를 파악하는 일은 내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명백하게 인정하는 일만 같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삶에서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이다. 분수를 지키며 살아갔던 선인들의 지혜와 현명함을 부정함은 아니지만 다만, 나에게 있어 분수의 새로운 의미는 거창하진 않지만, 단단한 디딤돌이 될 것만 같다. 조만간 정말 맛있는 단무지가 있는 분식집에 방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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