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리 Dec 12. 2022

타인의 삶에 빗대어

인간의 누구나 존중받기를 원한다.

언젠가 모두가 성숙이라는 열매를 맺길 바라는 나이가 되었을 때, 타인의 삶을 동경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에게 가장 동경적인 사람은 후광이 비추는 사람이었다. 혹 성격이 모두 다른 유형의 사람들과 있어도 기분을 좋게 만드는, 말할 때 빛이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멘토와도 같았던 인간 비타민을 찾기 위해 끝없이 조각하듯이 다듬으며 추상적인 대상을 만들어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을 믿음직하게 이끌 수 있는 사람도, 똑똑함과 지혜로움을 갖춘 사람도 아니다. 내가 가장 동경해왔던 이 세 가지는 내가 삶을 유연하게 살아가기 위해 소유해야만 한다고 정해두었던 것들일 것이다. 이에 따라 성품이 너그러우면서도 강인한 지도자, 무언가를 결정 내리는 일에 있어서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동경해 왔다. 결국 동경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나의 눈에 비췄던 동경의 대상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대상이었으며, 나의 편견 안에 고착화되어 있는 조각이었다.


이십 대 후반부터 때로는 막연하지만 더 나은 해답을 찾기 위해 물음표를 떠올릴 때가 많았다. 마음에 노여움과 슬픔이 공존해 눈물을 터뜨리는 날에도 울다가 문득, 울컥 차오르는 슬프고 분한 감정들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지 묻곤 했다. 여전히 울음 먼저 터뜨리는 나의 미숙함에 실망한 적도 많았다. 나에게 없는 단단함과 현명함을  갖춘 대상들을 보며 그의 삶은 완성에 가까워져 있는 것만 같다고 느끼곤 했다.


인간의 본성에는 누구나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존중尊重'이란 단어를 풀이하면 '높이어 귀중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존중을 받기 위해서, 혹은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안에 소속되어 있어야만 가능했다. 평등하게 주어지는 시간 동안 점점 늘어나는 인원 속에서 이 사회는 '시간의 효율'이라는 법칙을 만들어 내고 '단편적인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우수수 생산되는 결과물 속에서 나의 공허함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메워지는 듯했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결과물이 쏟아진 탓에, 타인의 삶에 빗대어 나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평균과 비교해 기준치에 그치지 못하면 공허함과 패배감이 동반되었고, 평균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루게 되면 충만감과 안도감이 동반되었다. 그저 주어지는 시간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내 삶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다만 그 기준의 주관적인 순위만 다를 뿐. 완성된 전리품만을 좇다 보면 행복에 도취되는 시간은 얼마일까? 나는 이 과정에서 조금 더 주체적인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회 안에서 명명되는 존중이 아니라 내 안의 존중을 찾는 과정에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하고, 모든 생각들을 헛되이 넘겨버리지 않기로 했다.


나의 성향 , 불혹이 되어도 공허함과 패배감을 쉽게 저버리지는 못할  같다. 그러나 가끔은 사회 속에서 벗어나 내가 나를 바라보고 느끼는 시간을 그대로 인지하고 대해 보기로 했다. 쓸데없다고 다그치거나, 헛된 허상과 망상뿐이라고 충언하지 않기로 했다. 칭찬보다 다그침이 익숙한 나의 세계 ,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때로는 그저 묵언을 통한 시간을 줌으로써 간접적 위로와 응원건네보기로 했다.


타인의 입을 통해 들었던 ‘다 괜찮아.’라는 말을 내가 나에게 해 줄 때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지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홀로 고속도로를 밟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