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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우총 Apr 07. 2023

상실의 아픔 속에, 사람들.

스즈메의 문단속(2023)과 쓸쓸해지는 영화관.





일 년만의 영화관
종이책과 ebook, 영화관과 OTT 서비스. 우리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볼 기회가 생겼다. 시내의 영화관, 매표소 위의 전광판에는, 맛있는 반찬들을 아껴두고 나중에 먹는 우리들의 식판처럼, 쟁쟁한 영화들이 스크린에 걸려있다. 여타 영화관처럼 매표소 옆에 있는 낡은 오락실 안의 기계들에는 전원이 다 들어와 있다. 드디어, 코로나의 강점기가 끝나간다는 걸 이런 사소한 부분들에서도 느낀다. 친숙한 그림체의 한 LED 포스터는 귀찮은 군인 우대 영화권 예매를 하기에 충분한 원동력이 되어주었고, 아침도 먹지 않은 나의 배는 팝콘의 냄새에 이끌리게 되어 있었다. 맨날 남기지만 별 수 있겠나, 내 몸 안 안방마님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한쪽 어깨에 반반팝콘을 안은 채, 영화관으로 입장했다.





항상 생각해야 한다. 영화관 내부는 촬영 금지다.

  

  영화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낀다, 내가 이 어둠과 동화되면서 눈이, 귀가 앞에 빛나는 화면에 동기화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엉덩이가 들어가다 마는 친숙한 동네 영화관의 의자, 팔걸이 끝에 매달린 차가운 콜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빵빵한 저음을 가진 사운드들.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느낄 때쯤, 눈이 어둠에 적응했을 때쯤, 모든 조명이 꺼지며 내 오감을 집중시킨다. OTT서비스는 아직 구현하지 못한, 몰입을 위한 장치들을 즐기며, 영화를 시청했다. 당연하게도, 팝콘은 한참 남았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 것이다. 영화가 나온 지 얼마 안 됐기에, 줄거리 요약은 없다. 여유가 된다면 영화를 보고 아래 글을 보면 좋겠다. 






눈이 즐거운 그림 사이에

아름답게 표현된 폐허는 로망이자, 향수이다.


  스즈메의 문단속(すずめの戸締まり, 2023)은 재난과 상실의 아픔에 대해서 다루는 작품이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주인공의 어릴 적 경험으로 심어진 트라우마에 대한 장면이 나오고, 바로 다음 장면으로 울고 있던 아이 대신, 평범하게 학교를 가는 학생 스즈메의 모습이 나온다. 이 트라우마에 대한 부분은 그렇게 심각하게 조명되지 않다가,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마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구성이 애써 잊으려 했던, 누구보다 치열하게 평범한 삶을 살려했던 스즈메의 12년을 강조하기 위해 택한 것이라면. 의도가 들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작가의 의도에 대한 상상 또한 잘 만들어진 영화에서 할 수 있는 묘미 중 하나라 생각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첫 작품이 무엇이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어떤 대답들이 나올까? 내 경우에는 '초속 5센티미터'가 마코토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 사이에서, 어느 영화부터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느냐고 하면, 언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기록적인 히트를 달성한 너의 이름은(2016)부터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 중 3위의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넘기 힘든 아성이 아닌가라고. 너의 이름은(2016)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사람들은 눈이 즐거워지는 아름다운 배경과 색감을 꼽는다. 실제로도 마코토 감독은 이 영화 이후로 빛의 마술사라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의, 광원과 색채에 대한 감각이 출중하다고 평가를 한다.






수려한 자연환경에 대비되는 색이 항상 존재한다.


  황홀한 하늘, 신록의 색을 간직한 자연의 풍경, 웅장한 도시의 전경은 마코토가 놓치지 않는 영화의 포인트이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너의 이름은(2016)과 날씨의 아이(2019)의 대부분의 장면들, 특히 전경이 강조되어 있는 장면들을 살펴보면 중심 색이 노랑에서 파랑 사이의 색상들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너의 이름은(2016)에서 이에 대비되게 강조되는 색깔은 우주의 색채, 신비를 상징하는 보라색이고, 날씨의 아이(2019)에서는 구름의 순수함을 나타내는 회/흰색 계열의 무채색이 강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색감에 대한 이야기를 왜 꺼냈는가,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생각이 날지도 모르겠다.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2023)에서 전체적인 전경에 대비되는, 강조된 색상은 검붉은 색상이다. 전작들에 비해 확연히 어둡고 본격적인 '위험'의 색이다. 그리고 이 역시 의도된 선택이었다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이 다루고자 한 주제를 처음 제대로 등장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지난 작품들보다 다루는 문제의 무게가 훨씬 커졌다. 너의 이름은(2016)에서는 혜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잊혀진 마을, 변형된 지형, 그리고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들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지진에 의한 피해를 정말 에둘러서 가리키고 있다. 날씨의 아이(2019)에서는 폭우로 묘사되는 일본, 도쿄를 덮친 피해는 수해(水害), 쓰나미를 연상케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2023)에서 묘사되는 재난은 '지진' 그 자체이다. 때문에, 어느 때보다 강렬한 색상으로 대비되는, '위험'을 상징하는 검붉은 색이 쓰였고, 거대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이번 영화를 보면, 저번 작품들이 빌드업이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황혼의 빛을 간직한 하늘은 황홀할 정도로 초현실적이다.


  다른 많은 점들도 마음에 들었다. 날씨의 아이(2019)에서 찬사 받은 구름과 하늘에 대한 세밀한 표현, 훨씬 무거워진 주제와 함께 영화관에서 들으면 가슴이 울리는, 베이스 드럼의 소리가 짙게 깔린 ost들, 늘 먹던 맛을 안겨주는 선남선녀의 스토리, 너의 이름은(2016)에서 보여준, 도쿄의 웅장함을 보좌하는 여러 빛들이 만들어낸 건물의 그림자들, 자연스럽진 않았지만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 중간중간 쓰인 3D 애니메이션들... 내게 100명이 찾아와도 100명 모두에게 추천해 줄 수 있는 그런 영화라는 생각이다.






마블 영화와 손익분기점

이번 역시 손익분기점을 고려조차 해본 적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있어서 이번 작품은,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을 과연 내가 보게 될까 하는 망설임을 깨닫게 해 준 작품이다. 대중적으로 재밌는 작품, 흥행한 작품에 반기를 든다니, 상당히 힙스터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런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부분 역시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표한 부분이다. 그걸 조금 내 방식으로 설명할 뿐, 상기 말한 의도는 뭐, 크게 없다.

  


이쁜 게임 전시대가 있으면 좋겠다. 이런 픽셀 쪼가리가 아닌 거로 말이다


  나는 어느 매체에서든 서사의 몰입도에 대해서 민감한 편이다. 서사가 잘 녹아들 수 있게 연출을 구성한 게임,  흡인력 있는 문학, 영화들을 좋아한다. 나머지 요소들은 부수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게임에선, 그래픽, 조작감, 편의성은 뒷전인 것이다. 이런 나는 이번 영화를 보고 '너의 이름은'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 이번 영화도 서사의 큰 틀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 다른 두 사람에게 두 영화를 하나씩 보게 하고 한 줄로 요약하게 만들면 정말 비슷할 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남주가 신비로운 무언가의 힘을 빌어서 다른 시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랑하게 된 여주를 구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여주가 신비로운 무언가의 힘을 빌어서 다른 지역에 살고,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랑하게 된 남주를 구한다." 



2019년도 기준 박스오피스 수익 7위(어벤져스), 9위(울트론), 5위(인피니티 워), 1위(엔드게임) 순이다.


  어느 시대에도 잘 팔리고, 감동을 주며, 올라가는 크레딧을 보며 재미있었다고 말할 영화는 성공한 영화이다. 그런 영화를 만드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을 것이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영화에서는 최대한 생동감 넘치는 액션신과 장엄한 분위기를 구축하는데 연출팀의 뼈를 깎는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고, 불굴의 명작 '타이타닉'에는 배우들의 메소드 연기와, 절묘한 사랑을 이끌어내는 스토리라인을 써낸 작가, 자신의 메시지를 최대한 담고자 했던 감독의 송골하게 맺힌 땀방울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 영화도 '흥행할 수 있는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답변을 주었다 생각한다. 앞서 말한 훌륭한 점들이 빛을 보였고,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마코토 감독의 외침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느낀 것은 일종의 매너리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본 '초속 5센티미터(2007)'의 감성은 온데간데 없고, 너의 이름은3 가 출시된 것만 같은, 기대받고 있던 유망작이 그 퀄리티를 유지한 채 나왔지만, 다른 무언가를 기대했었는데... 라는 아쉬움? 정도의 감정이다. 내가 무슨 점에서 그렇게 아쉬웠을까 철저히 분석해보자.






캐릭터, 소재의 전개도




대사가 꽤 오글거린다. 하지만 나중에 엔딩곡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코토의 영화에서 대개 등장하는 문제의 해결 수단은 '신비로운 힘'이다. 일본의 토속 신앙을 많이 불러오는 모습을 보이는데, 자국의 영화로서 자국민의 문화를 적절히 녹여내는 데에는 이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단, 이 소재는 스토리에서 너무나 강력한 뼈대, 기반으로서의 작용을 하도록 설정을 해두어서,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너의 이름은(2016)에서 할머니의 말씀/무스비(), 미츠하의 쿠치가미자케, 날씨의 아이(2019)에서 지하상가/신사에서 무당이 하던 말, '맑음 아이'에 대한 설화, 이들은 운명적인 등장과 함께 무조건적으로 지켜진다. 이렇게 극 중에서 너무나 강력한 장치들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자칫하면, 우리 스크린 앞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들의 자유 의지가 침해되는 것처럼 느낄 테니 말이다. 타키가 미츠하를 구하는 선택이(너의 이름은, 2016), 호다카가 히나를 선택하는 장면이(날씨의 아이, 2019), 어떤 거대한 힘에 아래에서 결정된 선택(?)이란 기분이 들면 좀 맛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2023)에는 전작들보다 훨씬 불친절하다.



1680km의 대장정이다. 작중에서 나온 것처럼 시코쿠(四国)에 도착하는 것만 해도 페리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이번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신비는 소타의 '토지시'이다. 작중 미미즈의 첫 등장과 함께, 토지시의 역할이 봉인된 미미즈, 즉 지진을 막는 것임이 제시된다. 그 바로 다음에, 소타는 세 발 의자가 되어버린다. 너무나 일찍 퇴근한 소타 때문에, 주인공 스즈메는 바로 다음 지진을 막기 위해서 미야자키(규슈) - 에히메(시고쿠) - 고베(간사이) - 도쿄(간도) - 이와테(도호쿠) 에 이르는 국토 종단 여행을 떠난다. 자신이 요석을 뽑아버려서 이렇게 된 거라는 죄책감 하나로, 스즈메는 결국 전국 일주를 하게 되는데, 조금 부족한 것 같지 않나? 


  소타에게 '한눈에 반했다'같은 감정을 느껴서도 아니다. 소타와의 첫 만남에서 묘사된 감정은 그저 '기시감'이었다. 아니 애초에 소타 쪽에서는 주인공에게 호감 표시를 한 적이라도 있나? 사실 의자로 변해버려서 할 틈도 없었다. 물론 우리는 '전지적' 시점이다, 소타의 내면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요석으로 변하고 난 시점부터 나오는 림보에서의 감정 묘사에서도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 한 마디 정도였다. 소타가 신고 있던 우리 강한 친구 육군의 전투화를 닮은 부츠처럼, 전우/동료애를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이 먼저 드는 부분이었다. 살고 싶다는 말이 너무나도 강하게 외쳐나왔고,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건 부수적으로 들렸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 곳,  의식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묘사,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너의 이름은(2016), 날씨의 아이(2019)에서도 느꼈지만 마코토는 잔잔한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로망은 이미 초속 5센티미터(2009)에 버려두고 온 것 아닐까.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2023) 역시도 주인공이 사람의 감정을 깨닫는 시점이 정말로 갑작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소타가 없는 세상이 더 두렵다.'라고 소타의 할아버지께 소리치는 장면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물론 요석이 되고 살고 싶다고 외친 소타가 나오는 장면이 그전에 나오긴 하다만..... 차분하게 한 장씩 감정이 겹쳐 올라가는 순정만화들의 거의 대척점에 있지 않나 싶다.










아름다운 폐허, 쇠퇴한 온천 리조트. 처음으로 떠오르는 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다.


  인물들의 감정 묘사에 대한 불친절함 말고도 다른 불편함도 있었다. 이번 작중에 나오는 '신비'에 관한 것인데, 거대한 지렁이 모습을 하고 있는 재앙 그 자체 '히미즈', 주인공 스즈메를 유도하는 흰 고양이 '다이진(大臣)', 이후에 합류하는 '사다이진(西大臣)', 이들은 배경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신비들이다. 이 신비들은 이번에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며 스토리를 견인해 나갔기에, 이들의 행동이나 거취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 초반부부터 스즈메를 따라다니는 고양이 '다이진'의 행동이다.







대신(大臣)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야 생김새가 눈에 들어온다.


  다이진(大臣), 이름부터가 대신, 왕을 보좌하던 가장 높은 품의 벼슬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다이진의 수염을 보고, sns에서 등장하던 한자를 포착했더라면 눈치챘을 특징이었는데, 영화를 보면서는 몰랐다. 고양이를 쫓는 이 여정에서 스즈메는 이상하리만치 고난이 없는 순행길을 걷게 된다. 로드무비라는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한 의도였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에히메에서 진흙탕을 구르고 나서는 낮에 귤 주워준 동급생의 민박집에서 베푼 선의를, 고베까지 가는 버스가 4시간째 안 오자, 에히메 근처에서 마침 고베까지 가는 친절한 술집 마담의 차를 타고 그녀의 일을 조금 도와주고 잘 곳을 구한다. 그, 애초에 스마트폰에 의자하나 달랑 들고 있는 여학생인데, 유괴당할 걱정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아무튼 신칸센을 타고, 처음 보는 후지산에 놀랐던, 도쿄에서는 편도 7시간 거리를 친구에 대한 일이라니까 선뜻 아무 대꾸 없이 운전해 주는 친구 세리자와. 참 인복이 많은 주인공이다.



복을 불러온다는 고양이 마네키 네코(招き猫)


  그리고 흰 고양이(白猫)가 일본에서 상징하는 바는, 인복이다(큰 의미로는 '복'이다). 스즈메가 이 서너개의 소모성 에피소드들에서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던 것의 복선은 그녀가 따라다닌 고양이 '다이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에 맞물려서 다이진이 사실은 그녀를 뒷문이 열리는 장소로 인도해 준 것이며, 다시 요석으로 돌아갈 때에 '나는 결국 스즈메의 아이가 되지 못했어.'는 대사까지 연계된다. 이러한 연계성, 개연성을 접하고 나서도 다이진의 캐릭터적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영화관에서는 오죽했겠는가. 다이진이 세리자와의 차에 올라탄 시점부터 요석으로 다시 변하는 시점까지. 그리고 묘하게 적절한 시점에 나타나주는 것 같았던 고양이 사다이진(西大臣)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일련의 행동들에서 이유를 찾을게 아니라 신의 '변덕'을 표현한 것뿐인가?라는 생각뿐이었다.



'신은 변덕스러운 존재다' 라는 말이 나오긴 하다만...... 












스낵 무비 컬처




이번에 필자는 군인 할인 50%로 7000원에 관람했다.


  마무리하며, 필자는 우리가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 점점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전보다 영상 매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다. 위 예시에 2000년도에만 해도 우리는 주로 인터넷상에서 글로 소통하던 시대였고, 조금 더 시각적인 정보라고 해봤자 사진 정도까지로 기억한다. 하지만 퍼블릭 영상 업로드 플랫폼(유튜브), 개인 방송 플랫폼 등의 출시와 함께 우리는 시각 매체 중에서도 가장 생동감 넘치는 정보인 '영상'을 어디서나 쉽게 접하게 되었다. 지하철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디서나 말이다.







항상 이런 유튜브들이 소스를 어디서 구해오는지 궁금했다. 파일을 살 수 있는 건가?


  그러면서 영화에 대한 인식도 격변을 맞이하였다. 지금도 여러 유튜브 채널들에서는 영화의 줄거리에 대한 요약 영상, 리뷰 영상이 올라오면서 더더욱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꿔놓고 있으며, 최근 5년 사이에 가장 많이 성장한 OTT 서비스들도 영화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고 있다. 그렇게 되면서, 저번에 영화관 값 인상에 대한 기사에서 사람들이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화를 찍는 비용은 인건비와 기술에 발전에 따라서 점점 올라가는데, 영화 감상 비용은 생각보다 많이 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기사의 주요 골자였다. 하지만 댓글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2000년 cgv 7000부터 2021년 14000원까지, 그렇게 많이 오른 건 아니지 않냐는 기사였다.


  그들의 말도 일부분 맞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관은 엔터테이닝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영화 하나로는 장사가 안된다 생각해서, 오래된 영화관이나 지방에 있는 그것 들에는 오락실, 노래방 등의 유흥시설이 같은 건물에 밀집되어 있고, 하다 못해 우리 이천에 있는 cgv도 매표소 옆 쪽에 바로 오락실이 있다. 그러면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익화를 위한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업을 진행하고,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 영화값이 올라가는 것이라는 주장에도 십분 공감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인식 변화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대신 20분짜리 줄거리 요약 영상을 보며 만족감을 얻고, 4분할로 결제해서 달에 5000원 정도 내는 월정액 OTT서비스들에서 지금까지 출시했던 영화들을 골라볼 수 있다. 그래서 영화관만이 줄 수 있는 경험에 중점을 두기 위해 멀티플렉스, IMAX, DolbyAtomos, 서비스들을 시작했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이다. 이미 영화는 쉬워졌으니까.








늘 먹던 맛이 나쁜 맛은 아니다.


  그래서 마코토 감독이 이번 작품도 이변 없이 안정적인 맛으로 출시한 이유도 이것에 영향을 받았다 생각한다. 영화 제작이라는, 작은 사업 하나에 비견되는 액수가 투자되는 일이, 이제는 불안정해졌다. 신인 감독이,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업을 거리낌 없이 펼치기에는,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안정적인 맛으로, 마코토 감독이 너의 이름은 4를 내면, 사람들은 구매해 줄 텐데, 뭣하러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제는 거장으로 평가받는 마코토 감독에게는 가벼운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신인 감독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질문일 것이다. 







뉴비는 언제나 환영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신규 유입이 없는 게임은 지속적인 운영을 해 나가는 데에 있어 불편함을 겪고, 20대의 유입이 줄어드는 한국 사회도 이제 막 어려움을 실감하는 찰나이다. 어쩌면 패러다임 전환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구식 영화관은 유산으로 남고, 이제는 OTT서비스에만 신규 영화가 출시되는 방향으로의 전환 말이다. 하지만 그것 이전에, 우리도 영화를 보는 시선을 조금 달리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성숙한 시선으로, 영화를 하나의 미술 작품처럼 감상하고, 오밀조밀한 디테일을 알아가는 그런 즐거움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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