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의 아침, 다시 시작되는 나의 시간
새벽 여섯 시, 연달아 울리는 알림음에 잠이 깼다. 한동안 깊은 잠을 잔 기억이 없지만, 스스로에게 불면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확인하자마자 메시지가 쏟아졌다.
“누나, 운동화 좋은 걸로 하나 사서 건강하게 지내.”
“동생, 환갑 축하하고 사랑한다.”
“앞으로도 젊고 건강하길 바란다.”
“언니, 이제는 더 행복하고 편안하길 바라요.”
남매들의 축하 메시지를 읽는 동안 눈물이 배어 나왔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숨기고 감추며 지낸 시간이 떠올랐고, 그동안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미안함이 가슴을 눌렀다. 사람보다 자연을 더 가까이 두고 살아온 나의 마음도 다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 고향은 전기가 겨우 들어오던 오지였다. 불이 켜졌다 꺼지는 집,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일을 마쳐야 했던 시절. 아홉 식구가 한집에 살았고 엄마는 늘 남의 집 농사일을 도왔다. 새참 시간이면 동생을 업고 엄마에게 젖을 먹이러 갔다. 엄마가 건네주던 새참 한 입은 그 어떤 음식보다 귀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웃 언니와 고무줄놀이를 하며 시간을 잊곤 했다. 등에 어린 동생을 업은 채 폴짝폴짝 뛰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 숙모가 흔들어 깨우며 “할아버지, 할머니 아침 챙겨라”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새벽에 언니가 결혼하러 서울로 떠났다고 했다. 보따리를 지고 간 오빠까지 함께였다.
나는 울음을 참으며 아침밥을 지었다. 언니와의 이별보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던 현실이 더 억울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여수에서 자취하던 오빠에게 보낼 식량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40분을 걸어 버스를 탔다. 갈 때마다 오빠는 생활비에서 500원을 내게 쥐여주었다. 그 작은 돈이 얼마나 귀했는지 모른다.
새 교복과 새 책을 입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선배들이 물려준 헌책과 교복은 한 해를 넘겨주는 선물이라 여겼다. 부족함을 불평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모 집에 얹혀 살았다. 사촌 언니는 팥쥐처럼 청소 심부름을 시켰지만 무상급으로 살았기에 반항할수 없었고, 하굣길 튀김집의 냄새는 늘 유혹했지만 쉽게 사먹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겨울이면 이모는 밤을 까는 부업을 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골목 입구 슈퍼 앞에서 두부 한 모와 콩나물 봉지를 들고 서 계시던 외할머니. 그 애틋한 눈빛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다.
할머니가 나를 불쌍히 여기셨을까, 아니면 깊이 사랑하셨을까. 이제는 그 마음을 온전히 알 것 같다.
이른 아침 울린 축하 메시지에 나는 답장을 보냈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 그리고 우리 형제의 혈통으로 태어난 것을 인생의 큰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예순이라는 나이를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제2의 인생을 차분히, 단단히 시작해 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지난날을 감추느라 애쓰던 마음을 내려놓고, 이제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록해 보려 한다. 자연을 좋아하는 나 답게 평온히, 조용하지만 단단한 방식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