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약 하나로 배부른 세상에서, 나는 여전히 꽃을 심는다

세상에 나를 맞추지 않기로 했다, 급할수록 더 느릿하게

by 수미연

구르는 소똥만 보아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웃음의 팔할은 곁에 있던 단짝 친구들, 숙희와 충애 덕분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각자 가져온 우산은 접어둔 채, 셋이서 가방을 메고 하나의 우산 속으로 어깨를 밀어 넣던 사이.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성장기를 건너왔다.

중학교 2학년, 학교에서 마을까지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의 산길은 우리의 거대한 놀이터였다. ‘좀 논다’는 동네 오빠들의 짓궂은 야유를 뒤로하고 산꼭대기를 숨차게 뛰어 내려가던 길. 엄마가 보자기 하나 두르고 싹둑싹둑 잘라주신 칼단발 머리를 하고서도, 나는 무엇이 그리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 뭉툭한 가위 솜씨를 이어받아 토요일마다 선생님들의 머리를 만져주던 ‘전담 헤어디자이너’ 소녀는 이제 희미한 기억 속의 풍경이 되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vpu9xzvpu9xzvpu9.png 소녀시절 길 안내해주던 오솔길을 생각하면서

그 시절, 미술 시간의 풍경은 유독 선명하다. 선생님은 종종 먼 미래를 예언하듯 말씀하셨다. “너희 스무 살쯤 되면 밥 안 먹어도 되는 세상이 온다. 마이신 알약만 한 영양제 하나로 배를 채우는 세상 말이야.”

그땐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겼는데, 돌아보니 정말 그런 세상이 와버렸다. 식이요법과 고농축 영양제, 한 끼를 대체하는 쉐이크가 일상이 된 시대. 하지만 세상이 알약 하나로 허기를 채울 만큼 빨라질수록, 나는 점점 더 숨이 찼다. 발을 맞추고 살아가기에도 벅찬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동작이 굼뜨고 찬찬한 내 성격은 자꾸만 ‘맞지 않는 옷’처럼 겉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결심했다. 세상에 나를 맞추기보다, 나의 세상에서 살기로.

사람보다 식물을 곁에 둘 때 마음이 놓이고, 위급한 일이 생길수록 오히려 더 느릿해지는 나. 남들은 답답하다 할지 모르나, 나는 이제 안다. 서두르면 반드시 실수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급할수록 여유로운 척 꽃을 가꾸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일수록 더 천천히 생각하며 순서를 정한다. 그것이 거친 세상에서 나를 지켜내는 나만의 방식이 되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하순. 베란다에 옹기종기 모인 반려식물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너희는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이해해 줄 수 있니?”

초록의 잎들은 말이 없지만, 묵묵히 제 속도대로 계절을 견디는 모습으로 내게 답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꽃은 피고, 느리게 걷는다고 해서 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지금 내 안에 머무는 이는 누구일까. 아마도 그 아이일 것이다. 산길을 뛰어 내려오다 잠시 멈춰 서서 이름 모를 풀꽃을 들여다보던, 세상의 속도보다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 단발머리 소녀. 나는 오늘도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나만의 속도로 하루를 가꾼다.

20251226_180314.jpg 2025년 반려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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