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2024]

에세이_09

by 석영

메리 크리스마스. 12월 25일. 일년 중 단 하루. 멈춘 시계. 한 해의 끝자락에서 그 언젠가 노스텔지아로 크게 되감기 하는 마법. 추워도 웃을 수 있는 날.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는 새 레고 장난감을 선물받는 날이었다. 25일 이른 아침 나는 눈도 채 뜨지 못한 꼴로 머리맡을 더듬는다. 짧은 손가락에 매끈하게 코팅된 박스 모서리가 스친다. 덜그럭. 아침잠은 온데간데 없고 이불을 박차 일어난다. 멀리서 박스의 전경을 보고, 다시 가까이 안에 든 제품에 대한 설명을 살핀다. 그리고 다시 덜그럭. 메리 크리스마스.

머리가 좀 크니 영악해졌다.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서부터 갖고 싶은 레고 신제품을 물색했다. 그래 이거야, 산타 할아버지 이걸로 부탁드려요. 선물 목록을 정하고 나서 이브가 되면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한해 동안 내가 열심히 살았고, 꽤나 성장했다는 대서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았으나 핵심은 마지막 한 줄이었다. "그래서 저 레고 스타워즈 2360(제품번호) 받고 싶어요" 누가 그 편지를 대리 수취할 지 알면서, 내 콩트는 딱 크리스마스 아침까지 이어졌다. 그 밤 사이 아빠는 겨울바람을 뚫고 어디로 가셨을까. 조금 더 크고 나서, 나는 콩트를 관뒀다. 왠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들고, 아빠의 눈을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졌다.

요번 크리스마스에는 레고를 사서 맞춰볼까 고민했다. 이내 단념했다. 조립할 때나 재밌겠지, 완성하고 나면 처치 곤란이었다. 좁은 자취방에 딱히 둘 만한 곳이 없었다. 너저분하게 구겨진 옷가지처럼 레고를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집이 조금 더 넓어지면 사기로 했다. 레고를 만들어놓고 가끔씩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가 생기면, 그때 사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에 장난감이 사라지니, 빨간 날만 남았다. 빨간 수요일, 망원시장 근처 카페에 가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2와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그러고선 시장에서 닭강정을 포장해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먹진 않았다. 싱크대 위에 잠시 두었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창틈 바람에 닭강정은 식어갔지만, 상관없었다. 원래 닭강정은 식어도 맛있는 음식 아니던가. 튀김옷이 조금 빳빳해진 닭강정으로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배가 찼다. 메리 크리스마스.

다음주 수요일도 빨간 날이다. 그날이 오면 해가 바뀐다. 기다리다 다시 멀어지다. 12월 25일, 유년을 향해 몇 걸음 도망치면 어김없이 새해가 찾아와 나를 낯선 곳으로 옮겨 놓는다. 그렇게 한 살 더 먹는다. 새해에는 비정기적으로라도 일기를 써보려 한다. 남겨야 할 것 같다.


2024.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