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53)
오래전에 모 공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그때 담임인 나를 무척 괴롭힌 녀석이 있었다. 개학하는 바로 그날 반애 한 명을 제 말 듣지 않는다고 두들겨 팬 뒤 달아나더니 무려 닷새가 지난 뒤 나타났다. 물론 그로 인한 처벌을 받았으나 이번엔 사흘 지나 또 한 애의 돈을 갈취했다 하여 학생과로 넘겨졌고. 뿐이랴, 심심하면 무단결석과 무단조퇴... 그러니 손을 잘 안 대는 나도 몽둥이를 들어야 했다.
허나 그뿐, 다른 애들과 달리 매를 겁내지 않았으니. 이런 일이 거듭되니 당장 제적시켜도 아무 소리 못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무단결석이 일주일 넘게 이어져 집을 찾아갔으나 도무지 부모도 아이도 볼 수 없어 결국 퇴학 처리하기로 결재를 올렸는데...
헌데 바로 다음날 학교에 나왔다. 등교한 녀석을 퇴학 처리할 순 없고 해서 한 번만 더 결석하면 제적시킨다는 약속 아래 다니게 했는데... 다음날이 체육대회 시작일이었다. 그때사 녀석이 다시 학교 나온 까닭이 체육대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시골 사람들에게 가장 성가신 풀이 뭘까? 논에는 바랭이, 방동사니, 여뀌, 자귀풀, 밭둑에는 소리쟁이, 쇠비름, 개망초, 가막사리... 잔디밭에도 쇠뜨기, 토끼풀, 민들레, 고들빼기, 냉이가 있어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지만 산이라면 단박에 답이 튀어나온다. 바로 ‘칡’.
내가 사는 곳은 시골에서도 산골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으니 지겹도록 끊임없이 칡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칡’ 정말 나쁜 녀석이다. 산이든 언덕이든 묵정밭이든 뿌리를 한 번 내리면 절대로 죽지 않으니까.
우리 집은 바로 위가 산이요, 오른쪽 왼쪽도 산인데, 아래쪽마저 언덕이라 칡넝쿨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오죽하면 내가 장편우화를 구상하고 있는데 제목이, 「칡의 지구 정복 시나리오」일까. 정말 넌덜머리가 나게 만드는 녀석이다.
그래선지 가끔 칡이 나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꿈을 꾸다가 가위눌린 때처럼 깜짝 놀라 일어날 때도 있다. 정말 치를 떨게 만드는 녀석이 칡이다. 아마 산골에 단 일 년이라도 살아본 이라면 다들 공감하리라.
그렇게나 나를 괴롭히는 칡이 이맘때가 되면 잠시나마 즐거움을 준다. 칡꽃 때문이다. 산골마을이니까 칡이 많음은 당연한 일, 따라서 칡꽃도 많이 핀다. 굳이 산속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길가 언덕에 넌출지듯 매달리니까.
칡꽃은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늘어뜨리다가 끝에 자줏빛 댕기를 단 수수한 시골 처녀를 연상하게 한다. 늘어진 마디마디 달린 진자주색 꽃이 참 예쁘다. 그런 자태를 딴 데서는 볼 수 없는 터라 더욱 정감이 간다.
헌데 칡꽃은 자태보다 향기에 더 점수를 줘야 한다. 칡꽃 향기보다 더 달큼한 내음이 또 있을까. 그냥 콧속으로 꿀이 밀려드는 것 같다. 그러니까 코로 꿀을 마신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만큼 단내 풍기는 꽃이다.
집 안에서 창을 통해 바라보면 갈맷빛 융단 위에 진자주색을 덧칠한 풍경화에다, 칡꽃의 꿀향이 그대로 들어오니 눈과 코가 큰 호사다. 거기다 비마저 내리면 칡넝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고, 특히나 칡꽃을 건드릴 때마다 살짝살짝 몸을 흔들어대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칡을 한자로 ‘갈(葛)’이라 하고, 칡뿌리를 ‘갈근(葛根)’이라 한다. 감기 걸렸을 때 한의원에 가면 주는 갈근탕(葛根湯)이 바로 칡뿌리로 만들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칡뿌리만 약으로 쓰는 줄 아나 칡꽃 즉 ‘갈화(葛花)’도 주독을 풀고 간을 보호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동의보감에 소개돼 있다.
게다가 칡꽃은 갱년기 여성에게도 좋아 혈액 순환과 불면증과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 하니 칡차로 만들어 장복하면 몸에 좋다. 그러니 칡이 그렇게나 애물단지로 늘 우리에게 피해만 주는 게 아니라 이로움도 준다는 말이다.
다시 우리 반 꼴통 녀석으로 돌아가 보자.
축구, 농구, 달리기 등이 열린 체육대회에 맞춰 다시 학교에 나온 그 녀석은 닷새 동안 종목마다 선수로 뛰면서 훨훨 날아다녔다. 2학년이었건만 3학년도 참가한 대회에서 축구 결승골을 넣었고, 400m 계주에서는 마지막 주자로 나서 두 명이나 앞지르고 1등을 했다.
마침내 내가 담임 맡은 과가 우승을 했다. 다들 힘써서 거둔 결과이지만 가장 큰 공로자로 그 애를 꼽음에 부인할 사람은 하나 없었다. 그런 뒤 그 애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까진 축구부였으나 가정형편상 그만두게 돼 갈등의 시기를 겪던 중이었다.
그 뒤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의 말을 들으며 서서히 변하더니 학년말이 되자 아주 모범생이 되었다.
아침부터 주저리주저리 늘어진 칡꽃에 코를 가까이해본다. 이슬로 하여 향기조차 젖었는가 하여 좀 더 가까이 하니 달큼한 내음이 톡 쏘듯이 들어온다. 한 번 더 칡향을 만끽하려고 호흡을 잠깐 멈추었다가 깊이 빨아들였다. 코로 들어온 꿀내음이 세포 마디마디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교직생활을 오래 했어도 워낙 인기가 없어선지 찾아오거나 전화로 안부 묻는 제자가 몇 안 된다. 그 가운데 그 애가 포함돼 있다. 나이가 쉰 살이 넘었건만 짬짬이 전화를 건다. 강원도에서 규모 적은 건설업을 하고 있다는데 경기가 안 좋은 가운데서도 자기는 전과 다름없다고 한다.
세상에 어떤 존재든 하등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 우리가 저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고 미리 낙인찍지 않는 한. 칡꽃을 본 오늘, 바르게 자라준 제자를 함께 떠올리는 오늘, 비록 폭염경보가 내렸지만 오늘 하루는 정말 행복할 것 같다.
*. 오늘 글은 2018년 어느 여름날 썼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