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54)
마을 한 바퀴 돌다 고추밭에서 고추 따는 전(前) 이장님 댁 아주머니를 만났다. 제법 바구니에 수북한 걸로 보아 해 뜨기 전에 나선 모양이다. 속을 들여다보니 고추 상태가 다른 해랑 달리 영 부실하다. 가지에 달려 있는 고추를 봐도 별로다. 궁금하여 물었다.
“올해 고추가 좋지 않군요. 벌써 병들었습니까?”
“아니... 아직 병은 안 왔는데...”
“그럼 왜 그렇지요?”
“아무래도 자랄 때 비를 제대로 못 먹어 그런가 봐요.”
그랬다. 고추 심을 무렵이 한창 가물 때였다. 가물지만 여태 비 안 왔기에 곧 오리라 믿고 심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안 왔으니. 모든 작물에게 비는 필수다. 비 없이는 자랄 수 없다. 편법으로 물을 대주기는 하지만 그걸로는 정말 임시방편일 뿐.
하늘이 주는 비와 사람이 주는 물은 물 땅속을 비교해 보면 금방 그 차이가 드러난다. 비는 얼마 내리지 않아도 스며들어 땅속이 축축하다. 반면에 호스로 물 주었을 때 파보면 위만 축축할 뿐 뿌리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제법 많이 뿌렸다고 해도 그렇다.
물론 비 가운데도 차이가 있다. 소나기처럼 내리는 비는 작물에 큰 도움 못 된다. 천천히 스며드는 ‘시나브로비’라야 한다. 즉 같은 10mm라도 소나기는 위만 쓸고 그냥 흘러내릴 뿐이지만, 시나브로 내리는 비는 땅속에 배어든다.
‘시나브로’란 말 그대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이니 이렇게 내리는 비를 ‘시나브로비’란 이름을 붙였다. 물론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요즘 우리 마을에 비가 자주 내린다. 그것도 아주 알맞게. 사흘쯤 맑다가 하루 비가 온다. 양도 적당히 10~20mm쯤 천천히 내린다. 이런 비를 맞으면 밭작물이 웃는다. 농부 눈에는 웃는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얼마나 고마우랴, 갈증 난다 싶으면 내리니.
사흘 햇살이 내리붓다가 그다음 날 비가 내리는 현상이 계속된 지 한 달쯤 다 돼 간다. 그래서 한 달쯤 전에 심은 작물들은 아주 신나게 자라고 있다. 들깨랑 열무랑 상추가 때깔 참 좋다.
그럼 우리 마을은 이제 가뭄이 해갈되었는가. 아니다. 작년 늦가을부터 올 늦봄까지 거의 비가 오지 않았으니 물이 태부족이다. 마을로 올라오는 저수지 두 군데가 말라 예년의 십 분의 일도 못 미친다. 물이 말라 갈라진 바닥이 거북이등 같다는 상투적 표현에 딱 들어맞는다.
다만 한 달 전부터 사흘 햇살 뒤 내리는 비가 심어놓은 작물에는 도움 되지만 저수지는 물론 마을 상수도에도 도움 되지 않는다. 딱 밭에 필요한 한 끼 식량 정도의 도움을 줄까.
어릴 때 부산 성지곡수원지 근처 우리 집이 자리한 곳은 산동네로 오르는 삼거리 길목이라 오가는 마을 사람들이 다 보였다. 저녁이 되면 아저씨들 손에는 한결같이 연탄 두 장, 쌀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게 하루를 때우는 양식인 셈이다.
한 달치를 사놓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은 대단히 사치스럽고, 한 끼 식량과 하루 연료 사기도 만만치 않을 때였으니까.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다 고등학교 다닐 때쯤 돼서야 깨달았다. 하루 벌어 한 끼 때운다는 말의 의미를.
요즘 우리 마을에 내리는 비에게 내가 이름 붙였다. ‘한끼비’라고. 딱 한 끼만 해결할 정도의 비라는 뜻이다. 가뭄 해갈에는 한참 못 미치나 밭작물엔 도움 되니 붙인 이름이다. 붙이고 나니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비가 내리는 날 반가움에 긁적거려 한 편 올렸더니 글벗 한 분이 “아 여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짜증 납니다.” 하는 댓글을 달았다.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 국토가 좁긴 해도 비 오는 곳에는 줄창 내리고, 오지 않는 곳에는 가뭄 드니 말이다.
이번 주말쯤 제5호 태풍 ‘송다’가 남해안으로 올 예정이라 하는데 여기로 지나갈지 모르겠다. 태풍에 이어 비가 오면 저수지 채우기는 어려운 일 아니다. 다만 밭작물은 피해 입겠지만. 비가 와도 큰일, 안 와도 큰일. 비와 상관없이 살다고 어느새 일기예보에 신경 쓰며 사는 삶이 되었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을 바엔 ‘한끼비’, 이 한끼비라도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적어도 밭작물은 목마르지 않을 테니까. 오늘 아침 마실길에 는개(안개보다 굵고 이슬비보다 가는 비)가 내렸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한끼비가 내렸다. 일기예보를 보니 사흘 뒤에도 비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만 요즘 일기예보가 빗나갈 때가 종종이라 확신하진 못하지만.
어릴 때 보던 아저씨들 양손에 들린 쌀 한 봉지와 연탄 두 장. 그 그림에 겹쳐서 내리는 비.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작품 하나 건질 텐데... 그래서 그림 배우고 싶은 욕심이 식을 줄 모른다.
*. 오늘 글은 2018년 어느 여름날 썼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