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51)

제451편 : 신기섭 시인의 '분홍색 흐느낌'

@. 오늘은 신기섭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분홍색 흐느낌
신기섭

이 밤 마당의 양철쓰레기통에 불을 놓고
불태우는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
우르르 솟구치는 불씨들 공중에서 탁탁 터지는 소리
그 소리 따라 올려다본 하늘 저기
손가락에 반쯤 잡힌 단추 같은 달
그러나 하늘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검은색,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일순간
그해 겨울 용달차 가득 쌓여 있던 분홍색,
외투들이 똑같이 생긴 인형들처럼
분홍색 외투를 입은 수많은 할머니들이
나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
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
값싼 외투에 깃들여 있는 석유 냄새처럼
비명의 냄새를 풍기는 흐느낌
확 질러버리려는 찰나! 나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
분홍색 외투의 마지막 한 점 분홍이 타들어 가고 있다.
- [분홍색 흐느낌](2006년)

#. 신기섭 시인(1979년 ~ 2005년) : 경북 문경 출신으로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등단하던 그 해 영천 출장 가는 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이듬해 2006년에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이 나옴.
(참고로 동명이인으로 울산 언양읍 출신의 신기섭 시인도 있음)




<함께 나누기>

"살아서 몇 년만 더 시를 썼으면 기형도 시인의 환생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탄식을 낳게 했던 시인.
하늘나라에서 어디에 쓰려고 26세 젊은 시인을 데려갔는지 참 안타깝고 애석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작가의 이력과 작품을 연관시켜 작품을 분석하려는 방법을 '역사주의 비평'이라 했는데 지금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 작품은 시인의 이력을 알고 읽으면 훨씬 쉽게 이해되리라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시인의 이력을 뒤지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만 '수색'을 멈추게 됩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다가 죽었고, 어린 아들을 책임져야 할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고, 할아버지는 중증 치매에 걸렸으며, 오직 노쇠한 할머니 혼자 손주를 거둘 수밖에 없는 상황.

시인이 눈 뜨고 세상에서 가장 먼저 봤던 얼굴은 어머니 대신 할머니.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마지막 남은 분홍색 외투를 태우며 훌쩍입니다. 그 훌쩍임을 '분홍색 흐느낌'이라 했는데, 허나 그 분홍빛 흐느낌을 제대로 훌쩍이지도 못한 채 시인 역시 교통사고로 요절하고 맙니다.
26년 간 가난과 외로움을 등에 진 채 살다갔지만 그의 선배와 동료가 뜻 모아 유고 시집을 펴냅니다. 그 시집 제목이 바로 [분홍색 흐느낌].
서울예대에서 시인을 가르쳤던 김혜순 시인은 추천사에서,
"기스바! 네 할머니 톤으로 너를 불러보자. 노래의 날개를 달고 이 세상에 와서는 이승을 저승처럼 살다가 노래의 나라로, 그 아득한 곳으로 가버렸구나."


요즘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친구 부모님은 거진 다 떠났고, 이제 바로 그 친구가 하나둘 떠납니다. 제 나이가 나이다 보니 그렇겠지요. 그분들 가운데 장례식장에 갔다가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오래오래 그분을 못 잊고 삶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지요.
죽은 사람이 살다 간 흔적의 빛깔을 남긴다면 어떤 색일까요? 흰빛, 잿빛, 검은빛, 노란빛, 그리고 분홍빛... 시인에게 할머니는 분홍빛으로 남습니다. 물론 분홍빛 외투를 태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를 대신한 할머니는 시인에게 분홍빛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분홍빛 외투가 타면서 남긴 불씨는 솟구쳐 하늘을 검게 가득 채우지만 떠나간 이의 분홍빛 기억들이 시인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칩니다. 아픈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 솟구쳐 검은 하늘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다가 화자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와 분홍색 흐느낌으로 잠깁니다.


시인이 사망하기 직전 홈페이지에 남긴 글입니다. 마치 자기에게 닥칠 사고를 예고라도 하는 듯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무심코 창문을 바라보니 옥상에 흰 눈이 쌓이고 있다. 오늘은 눈이 많이 온다는데, 새벽에 출장 떠나다. 영천행.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이다. 옥상에 쌓인 눈은 나 아니면 밟아줄 사람이 없는데... 이런 장소를 가진 내 생활이 새삼 뿌듯하다. 다녀와서 발자국 몇 개 꼭 남겨야지. 여전히 옥상에 눈이 쌓이고 있다 ”

오늘 아니면 내일 사랑하는 누군가 떠나가는 슬픔을 남길지 몰라도 아름다운 빛깔의 추억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32살의 신랑과 92살의 신부